사도행전 21장
21장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1-16), 야고보를 만나는 바울(17-26), 그리고 성전에서 바울이 체포되는 장면(27-40) 이렇게 3가지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세 장면을 통해 행 21장은 먼저 바울이 예수님을 닮은 제자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 신실한 유대인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율법 준수는 구원 문제와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참고, 21절)과 이방인 선교가 침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 그리고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단락 구분
1-1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생긴 일들(두로, 가이사랴)
17-26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바울
27-40 예루살렘에서의 폭동과 바울의 체포
. 21장은 바울이 예수님을 닮은 제자임을 보여준다.
21장의 주요 내용
- 예수님과 바울이 닮아있다.
1) 눅 9:51절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굳게 작정하시매” 바울도 성령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함.
2) 둘 다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었다.
3) 예수님과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표현을 쓴다. 21:11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4)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 눅 9장에 두 번, 눅 13장에 한번.
바울: 20:22-24(에베소), 21:4(두로), 21:10-11(선지자 아가보)
5) 결연한 의지, 굳게 결심하심. 21:13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6) 하나님의 뜻을 구함.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 21:14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바울이 신실한 유대인임을 보여준다. 유대교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겐그리아에서의 서원 후 머리 깎음, 기독교 복음이 유대교의 완선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교에 신실했더니 바로 잡히는 모습이 보인다.
1-1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생긴 일들(두로, 가이사랴)
1-6
누가는 이 단락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방문한 곳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1-3절까지는 각각 하루 일정이 걸리는 이동 경로를 빠른 속도로 언급한다. 4-6절은 바울이 7일 동안 머물러 있던 시리아의 주요 상업도시인 ‘두로’에서의 일정을 기록한다. ‘우리’ 단락(we section)이 1절에서 시작해서 18절까지 이어진다.
바다라: 큰 항구도시. 여기서 배를 갈아탔다.
두로에 언제 복음이 전파되었나? 아마도 스데반의 환난 때 흩어진 사람들이 전했을 것이다. 베니게에 소속된 지역이 두로이다. 11:19
4절
이 곳에서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직면하게 될 핍박을 환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 같다(4절). 그리고 두로의 제자들은 이 환상을 기초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만류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성령이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이다(행 19:21, 20:22-23).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혹은 ‘성령 때문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께서 지시하셨기 때문에 바울을 만류한 것인가?
19:21절 “성령 안에서 계획했다”, 20:22 “성령에 매여”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서로 모순된 지시를 하신 것인가? 이 본문은 해석을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성령의 감동은 해석자의 의역이다.
디아(소통 목때): 소유격은 통하여, 목적격은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환상을 주셨는데 그 환상을 해석한 결과. 환상과 해석을 구분해야 한다. 환상 자체로만으로는 안된다. 해석이 따라가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베드로의 해석, 고넬료의 환상과 베드로의 해석. 환상에 대해서 제자들이 해석한 것이다. 바울 보고 가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5-6절
7일 동안 두로에 머물러 있던 바울은 두로의 제자들과 작별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때 제자들이 처자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며,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작별한다. 바닷가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장면은 밀래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이별할 때 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20:36). 이런 모습은 바울이 7일 동안의 일정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두로의 제자들과 끊을 수 없는 영적인 연합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7-9절
7-14절은 바울이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생긴 일을 기록하고 있는 단락이다. 가이샤랴는 헤롯 대왕이 세운 도시고, 갈멜산의 남쪽에 있는 주요 항구도시로 4개의 항(harbor)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 총독이 주둔.
바울은 가이사랴에 도착해 ‘일곱 일꾼’ 가운데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빌립은 행 8장은 빌립이 전도자로 알려지게 된 사건들을 소개한다. 빌립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딸이 있는데 다 예언하는 자들이다. 사도행전 2:17-18은 예언의 은사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임함을 말하고 있다.
21:1 “우리” 저자 누가가 언제 빌립의 사건을 알았을 것인가? 여기서 알았다. 가이사랴에 방문해서 빌립의 사역 정보를 여기서 얻었을 것이다.
10-11절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이 기록되고 있다. 아가보는 이미 행 11:27-30에서 온 천하에 흉년이 들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예언한다.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어 보이며, 이와 같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이라 예언한다. 바울의 띠는 허리에 매는 허리띠(belt)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이 허리띠에 돈을 넣어두기도 했다. . 바울의 외투를 두르는 허리띠.
12절
아가보의 행동을 통한 예언을 바울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매우 걱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주목할 것은 아가보는 바울이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직면하게 될 상황만을 예언했지, 결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언의 내용은 바울이 앞으로 당하게 될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이 예언을 기초로 예언을 해석하고 추론해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만류한 것이다!
가지 말라는 것은 제자들이 예언을 해석하고 추론한 것이다. 아가보는 가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롬 12:6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이면 믿음이라는 잣대에 따라서” 개인의 믿음의 분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믿어야 할 복음에 대한 기준, 오늘날로 보면 교리의 기준에 따라서.
13-16
바울 주위 사람들의 만류와 이들의 눈물은 바울로 하여금 상한 마음을 갖게 한다.‘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에서 상하게 하다(신약성경에 딱 한번 쓰인 단어)는 표현은 ‘마음을 부수다’(break)하는 의미이며, 이때 부수다는 동사는 빨래하기 위해서 옷감을 때릴 때 사용하던 동사이다. 사람들이 바울의 감정을 요동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번 밝힌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을 각오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이런 태도에 사람들은 더 이상 바울을 만류하지 못하고 다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하셨던 주님의 기도를 연상시킨다(눅 22:42).
17-26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만나는 바울
행 21:17~ 행 28:31은 사도행전의 결론부에 해당한다. 이 결론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17-20상
17절에 의하면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날(18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난다. 야고보와 장로들(18절)을 만나 자신의 이방인 지역에서의 사역을 그들에게 이야기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이라고 표현한다. 바울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바울의 보고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미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에 관해 행 15장에서 회의를 통해 의견의 일치를 본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20하-25절. 바울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유대 기독교인들이었다.
바울의 이방인 가운데서의 사역은 또 하나의 의심 거리를 만들어 낸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들” 즉 유대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유대교를 허무는 내용으로 오해하고 있다. 21절에 유대 기독교인들이 바울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와 조건’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25절 참고). 21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바울에 대한 비판의 내용: 이방인에 대한 전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23-24
이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조언한 행동 즉 결례를 행하고 서원한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내고 머리를 깎게 하는 일(24절)은 결국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울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24절)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바울의 행동은 유대인 관점으로 볼 때 부정한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바울이 정결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머리를 깎는 행동은 나실인의 서원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제물을 드리고(26절), 머리를 깍는 행동은 나실인의 서원의 일부였다. 여기에 언급된 서원과 행동은 나실인의 서원(민 6:2-21) 그리고 정결 회복과 관련된 행동(민 6:9-10; 19:12)으로 보인다. 행 21:27에 의하면 바울의 서원은 일주일 동안이었으며, 바울이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행한 이방 세계에서의 부정한 상태를 정결케 하려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민 19:11-13).. 저자는 바울은 유대교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25-26절
이방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해 이미 교회의 입장이 정리가 된 상태였음을 25절은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율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의 경우, 바울은 유대인들의 정서와 문화에 대해서 융통성 있게 행동한다. 문화적으로 중립적인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복음 전파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고 있다.. 머리를 깎고 비용을 지불한다.
적용: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보라. 예루살렘에 있는 리더들이 바울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모습이 나타난다. 권위 행사, 의견 주입,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중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입장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7-40 예루살렘에서의 폭동과 바울의 체포
27-29
결례를 다 마쳐가는 단계에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음을 보고 무리를 선동해 바울을 붙잡는다. 이들의 고소는 두 가지 내용이다(28절).
(1)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다. 이스라엘 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가르친다.
(2) 성전을 모독했다.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
이 단락에는 irony가 존재한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의 관습을 존중하기 위해 성전에 와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의 관습을 무시한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죽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4.5 foot 높이의 돌로 된 표지석들이 여인의 뜰을 둘러싼 ‘바깥뜰’(outer court)에 세워져 있었다. 이 표지석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방인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안뜰(이스라엘 남자들의 뜰)에 들어가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진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Bruce, Acts, 1988a, p 409).
예루살렘 성전에는 1.4m의 경고문이 있었다. 여인의 뜰 바깥쪽에 표지석이 있었다.
30절
무리들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다.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성전의 안뜰)에 있는 바울을 끌고 이방인들의 뜰까지 끌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나중에 로마군대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올 수 있는 성전 지역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장면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방인의 뜰에서 바울을 폭행함.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바울이 성전에서 쫓겨남으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음을 보여준다.
31-32절
로마 군대는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60명이 보병이고 나머지는 말을 타고 다니는 마병(240명)이다. 이 군대는 성전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 ‘안토니(Antonia) 요새’에 주둔해 있었다. 이 요새는 성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역으로, 두 개의 계단이 안토니 요새와 성전의 바깥뜰과 연결되어 있었다.
천부장(31절)은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이방인의 뜰에 들어온다. 이 천부장의 이름은 나중에 글라우디오 루시아로 밝혀진다(행 23:26; 24:22). ‘백부장들’이라는 복수형 명사는 적어도 2명의 백부장이 함께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전에서 바울을 둘러싼 소요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바울을 “죽이려”(31절) 했기 때문이다.
33-36절
천부장은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게 한다. 아마도 두 군인이 각각 바울의 양쪽에서 자신들과 바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행 12:6). 34절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의 폭동의 분위기는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폭동(행 19:21-40)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죽이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눅 23:18). 유대인들은 예수님, 스데반을 거부하고 핍박했고, 이제 바울을 거부하며 박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부장을 통해 바울을 구해내고 계신다!! 바울은 이전에도 로마 관리들에 의해서 위기를 넘겼다(행 18:12, 행 19:35).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바울의 생명을 건져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37-40
행 21:37-22:29에는 바울의 첫 번째 변론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단락에서(1) 37-39절은 천부장과 바울의 대화가 다루어진다. (2) 행 21:40-22:21에는 바울의 첫 번째 변론 연설이 나오고, (3) 행 22:22-29에는 연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37절
바울 당시에 헬라어는 국제 공통어 (lingua franca)여서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도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헬라어를 말하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38절
여기에 언급된 애굽인의 활동은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다(J.W. 2.13.5 §§261-63). 이 애굽인은 벨릭스 총독 시대에 추종자들을 광야에 모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애굽인이 감람산으로 다가올 때 로마 군인들이 공격을 했고, 이때 이 사람은 도주를 하고 400명의 추종자들이 죽고, 200명의 추종자들이 체포된다. 여기에 기록된 바울의 체포는 이 애굽인의 폭동이 있은 지 3년 후에 벌어진 일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