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3장은 기적 사건과 기적에 대한 설명이 베드로의 설교이다. 설교는 앞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기적 자체가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기적은 설명이 필요하다.
3장 단락구분
성전 미문에서의 기적(1-10)
배경(1-3절)
치유(4-8절) 치유의 내용
백성들의 반응(9-10절)
베드로의 설교(11- 26)
배경(11절)
베드로의 설교[12-26]
(1) 정황설명 (12-18):
(2) 행동 촉구(19-26):
사도행전 3:1-10
3장 기적의 두 가지의 의미:
1) 사도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해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줌. 사도들이 천상에 계신 예수님의 대행자로 사역을 진행한다.
2) 앞으로 4장에 산헤드린 공의회와 유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계기를 보여줌. 핍박을 받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 단락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대표되는 1) 사도들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이 계속 이어감을 보여준다. 또한 2) 앞으로 사도들이 유대 정부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누가는 초자연적 사건에 이어 항상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사도행전을 전개해 간다.
-행 2장
-행 3장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사도들이 행한 “최초 기적” 기록(행에 총 14회의 기적이 기록됨). 또한 주목할 점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 중 내용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하는 단락이기도 하다.
여기 기적이야기가 보여주는 두 가지 특징
(1) 아픈 사람이 치유를 요구하기 전에 사도들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 기적을 일으켰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상징한다. 복음서에 보면 치유 사건에서 두 가지의 패턴이 있다. 믿음으로 다가갔을 때 치유하시는 경우와 요구하지도 않은 사람을 고치시는 경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도하심.
(2) 사 35:3-6
행 3:8절 “뛰어 서서 걸으며” 이사야서 35장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다리를 절던 자들이 사슴처럼 뛸 것이다. 약속했던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속했던 메시야 시대의 축복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줌.
여기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 이야기는 누가복음 5:17-26(침상에 메여 온 중풍병자)에 나오는 예수의 치유 기적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a. 둘 다 침상에 메여온다. 행 3:2 “메고 오니” 침상에 메고 온다는 말, 행 3:6
b. “일어나라”
c. 죄 사함. 행 3:19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눅 5 “죄 사하는 권세”
누가는 이 치유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일을 계속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 예수님의 천상 사역.
또한 행 14장의 바울의 사역과도 연관이 있다. 행 14:8- 루스드라에서 못 걷는 자를 일으킴.
베드로의 기적과 바울의 기적의 공통점.
a. 같은 종류의 환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14:8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b. 두 경우 다 아픈 사람을 주목해 봄: 3:4 “주목하여”, 14:9 “주목하여”
c. 일어나다는 동사 3:6, 14:10
d. 사람들의 반응이 유사하다. 3:12, 사람들이 신적인 인물로 본다. 14: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한다.
앞으로는 1) 예수님의 기적과 닮아있고, 2) 뒤로는 바울의 기적과 닮아있다.
1) 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사도들이 계속 이어가고 있음.
2) 왜? 바울이 베드로와 같은 기적을 베풂으로 베드로와 같은 영적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
이 사건은 또한 앞으로 유대 당국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을 기록하는 사도행전 4장을 미리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
배경(1-3절)
1절 시간과 장소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시간(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간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제물이 드려졌다. 아침 제물은 동이 튼 직후 즉 오전 9시에 드렸다(단 9:21, Judith 9:1, Josephus, Ant. 14.3.4 65), 그리고 오후 제물은 대략 오후 3-4시경(제 구시)에 드려졌다.
이 오후 기도시간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간이기도 하다(행 10:3,30).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이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참고 눅 1:8-10, 21 이하). 두 사도도 이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다. 이 기적의 사건은 2:43절과 2:46절의 부연설명의 의도가 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2:43) 절의 말씀을 설명함.
2:46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 미문 사건을 통해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모였음을 보여줌.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제자를 드린다. 오전 9시와 오후 3-4시에 드린다.
사도들이 잡힌 이유는 부활을 증거함과 성전 소란 죄에 해당한다. 성전 제사 시간에 베드로의 설교로 사람들이 웅성거림에 따라 오후 제사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언제 메고 왔을까? 아침부터일까? 오후 3시였을까?
*미문(the Beautiful Gate)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이 미문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치 않다. 후보지로 거론되는 것은 (1) 니카노르 문 (the Nicanor Gate)과 (2) 수산 문(the Shushan Gate)이다.
요세푸스는 고린도식으로 만들어진 니카노르 문(여인의 뜰 또는 이스라엘의 뜰 근처)이 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성전의 다른 문들에 비해 규모가 큰 문이고, 또 여러 가지 장식이 잘 된 문이라고 언급한다. => 그러므로 아름다운 문을 여기로 볼 수 있다.
Fitzmyer: 상징적,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기에..
성전 동쪽에 위치한 ‘수산(Shushan) 문’ 성전 외부에서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
(1) 수산 문은 성전 밖에서 이방인들의 뜰로 이어지는 문이다. 또한 (2) 베드로가 이 사건 직후에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장소인 솔로몬 행각(3:11)과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비둘기와 다른 제물들을 매매하는 시장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따라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구걸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을 것이다. (3) 3절-성전(히에론) 성전 전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 vs. 나오스(성소, 지성소) 즉, 성전 동쪽에 위치한 문이었을 것.
치유(4-8절)
3절-5절
*처절한 형편
이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오가는 사람에게 오랜 기간 동안 구걸(40세)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도 이 사람이 그 문에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성전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알고 있었을 것(예수님을 알았을 수도, 제자들을 알았을 수도 있다.)이며, 이 사람은 구걸하는 것으로 자기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사도들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 사람으로만 여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4절)고 말한다. ‘우리를 보라’라는 두 사도의 명령에는 이 사람 속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돈’밖에 없다.
6절 기대가 무너지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신다. 돈을 구했지만 구원을 주신다. 내려놓게 하시면 그 이상의 것을 주신다.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시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신다.
‘금과 은’에 대한 언급은 사도들의 형편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2:44-45).
-두 사도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초대교회의 상황
1) 초대교회와 사도들이 금과 은을 축척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2) 현 상황에서는 사도들이 재산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상대의 필요에 따라 일대일로 서로 나눠줌(2:44-45). 시간이 지나면서 4장에 가면 사도들이 권위를 가지고 나눠주는 형태로 조직화된다.(4장,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숙어적 표현으로 누구의 통제 하에 둔다는 의미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예수는 없지만 금과 은은 있다고 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1. 예수 그분, 2. 예수의 능력)
(1) 두 사도는 이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한다. 사도행전에서 ‘이름’은 인물(person) 즉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고(행 3:16), 능력(power)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행 4:10).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3장과 4장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쓰인다(3:6,16; 4:10,18,30).
(2) 예수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들의 사역이 다름 아닌 예수의 천상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서 사역하심.
7절 <일으키니>
치유의 문맥에서 쓰인 7절의 ‘일으키니’라는 동사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5장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에서 그에게 하신 ‘일어나라’는 명령을 연상시킨다. 발과 발목: 누가의 직업적 특징을 보여준다. 직업병. 당시 의사들이 자주 사용하던 단어이다. , 오른손,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같을 일을 하고 계심.
8절
치유받은 이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누가가 여기에서 쓰고 있는 7개의 동사는 이 사람의 기쁨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도행전에서 기쁨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특징이다(2:46; 4:21,24; 5:41; 8:39; 11:23; 12:14; 13:48, 52; 15:3; 16:25, 34; 19:17).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송하니.=> 7개의 동사로 기쁨을 묘사한다.
사도행전의 중요한 신학: 기쁨의 신학.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흐르는 중요한 신학이다.
누가복음은 “큰 기쁨”이라는 단어로 인클루지오 구조이다. 눅 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녹 24:52 “큰 기쁨”
사도행전 복음이 들어가는 현상에 나타나는 반응.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2:46,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8:8, 이방 내시도 기뻐한다(8:39).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세상에 큰 기쁨을 주셨다. 복음이 들어가는 지역마다 “기쁨”이 일어난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서 기쁜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기쁨이 없다는 것은 잘 확인해봐야 한다.
<‘뛰어 서서 걸으며’>라는 동사가 결합된 본문: 이 치유 사건과 사도행전 14장의 바울의 치유 기적.
본문에서 치유된 사람에 대해서 ‘뛰어 서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사야 35:3-6(LXX)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사 35:3-6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사람의 치유를 통해 이사야가 예언했던 종말에 시온 산에서 벌어질 하나님 백성의 회복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종말에 메시아가 올 때 나타나는 구원의 혜택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8절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자는 구약법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21:17-20, 삼하 5:8) 난 생 처음 성전에 들어갔던 것 같다. 성전 앞에서 성전만 바라보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쁨이 있었다.
8절의 두 가지 회복
1) 육체적 회복
2) 성전에 들어가는 영적 회복이 이루어졌다. 8절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치셨다고 선포한다. 치유의 현상을 특별한 사역자의 능력으로 보는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는가? 예언기도를 의존하는 현상들.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안라 사람을 의지하게 된다.
백성들의 반응(9-10절)
9-10절
이 두 구절은 치유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모든 백성’(9절)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방문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며, 따라서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3:12). 이 사람들의 반응은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설명되는데 이것은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누가는 기적에 대해 사람들을 반응을 빼지 않고 기록한다(눅 4:36; 5:26; 11:14; 18:43). 놀람과 두려움은 믿음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이것이 믿음을 일으킨다(참고 행 4:4).
놀람이, 기적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놀래는 정도이고 베드로의 기적에 대한 의미 설명 후 믿음이 발생했다. 기적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베드로의 설교 (3:11 이하)
성전이 복음 전도의 중요한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기적은 항상 해석이 따라야 한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는 것은 환상 때문이 아니라 환상에 대한 해석 때문에 간다. 그 설명을 듣고 가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말리는 선지자들이 있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성령께서 가라고 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막으실까? 뒤의 사람들은 자신이 본 환상을 본인들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환상과 해석은 분리되어야 한다. 해석이 중요하다. 해석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고 믿음을 일으킨다.
누가는 초자연적 사건과 이에 대한 해설을 함께 묶는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벌어졌던 치유 기적에 대해서 설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둘러싼 군중들을 향해 이들의 오해를 고쳐주면서 치유 기적이 자신들의 능력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밝힌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에 대한 해설이 요엘의 예언으로 설명이 되는 반면, 여기 치유 사건은 신명기 18:15의 말씀으로 설명이 된다(행 3:22-26).
베드로의 설교[1] (12절-16절)
베드로는 몰려온 군중들에게 부정과 긍정의 말을 전한다. 먼저 부정하는 말의 내용은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자신들이 아닌 점을 밝힌다(12절). 이어 긍정의 말은 예수에 대해 소개와 관련이 있다. ‘그 이름’(16절)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가 11절을 제외한 12절~16절의 내용이다.
설교의 단락 구분
(1) 정황설명(12-18):
기적이 벌어지기 전에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한 이유에 대해 설명(12-15)
예수 그리스도 소개(16절)
백성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 설명(17-18절)
(2) 행동 촉구
적용 부분
그러므로... 어구로 시작: 2개의 명령: “회개하라!, 돌이키라!”. 헬 원문에는 두 개의 명령이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
1)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13)”=> 언약의 하나님. “연약의 자손이라(25절)” 시작과 끝에 언약이 등장한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 구약을 인용함. 행 3:22-23=> 신 18:15. 행 3:25=> 창세기 12장, 22장, 26장, 28장.
유대인들이 아는 구약에 호소, 언약을 언급: 즉 예수께서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준다.
(2) 그런데 너희들이 그 약속을 거부했다. (3) 회개 촉구/경고=> 메시아를 거부할 때 멸망을 받으리라.
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조시킴.
13-15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이스라엘이 한 일을 대조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대조.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 너희가 거부하였다.
3) 예수님을 소개하는 호칭이 강하게 많이 등장한다. 6개.
그의 종(13), 거룩하고 의로운 이(14), 생명의 주(15), 그리스도(18), 나 같은 선지자(22), 너의 씨(아브라함의 씨)(25)
*베드로의 설교는 기독론적인 설명과 종말론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1) 기독론
- 하나님의 종(13절, 26절)
- 거룩하고 의로운 이(14절)
- 생명의 주 (15절)
- 그리스도(18절- 자기의 그리스도, 19절- 예정하신 그리스도)
- 모세와 같은 선지자(22절)
- 아브라함의 씨(자손) (25절)
(2) 종말론
- 두 단계의 종말을 설명함: 초림과 재림 (재림- 20절, 초림 -26절)
- 누가복음에서 미래의 종말(재림의 소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함.
베드로 설교의 배경(11절)
11절은 베드로가 하는 설교의 배경을 제시한다. 11절은 바로 앞 10절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반복한다. 새로운 요소는 설교의 장소가 ‘솔로몬 행각’이며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 구역은 여러 주랑들(porticoes)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솔로몬 행각이었으며 이 행각은 성전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방인의 뜰과 그 주위 주랑들에서는 서기관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도 하고 논쟁을 벌였으며(참고, 눅 2:46; 요 10:23),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환전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David Williams). 백성들은 두 사도들을 향해서 달려와 모여들었다.
베드로의 설교: 정황설명(12-18)
기적이 벌어지기 전에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한 이유에 대해 설명(12-15)
예수 그리스도 소개(16절)
백성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 설명(17-18절)
12절
두 사도를 대표해서 베드로는 이 치유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 부정하는 말을 먼저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다(3:4). 이제 군중들이 두 사도를 ‘주목’하여 본다. 두 사도는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낫게 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 보도에서 논쟁은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가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이 기적을 누가 일으켰는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이방인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행한 사람들을 신과 같은 사람(divine men)으로 보는 경향이 그 당시에 있었다. 사도행전에는 이 치유 기사와 유사한 내용이 행 14:8-18에 등장한다.
베드로는 이 기적의 근원은 자신들의 힘과 경건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이방인들의 반응과 흡사하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기적이 사람이 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부정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바꾸어 놓는다.
13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언급하며 이 기적의 근원이 영화롭게 되신 예수이심을 밝힌다.
(1) 하나님의 종 종은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하시는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1)‘그의 종’ 즉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고(수 1:7, 13; 9:24; 11:12;15; 12:6; 14:7; 18:7, 대상 6:49; 대하 24:9), 또한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사 52-53 LXX)에 등장하는 종에게 이 호칭이 사용된다.
누가 행전에서 이 호칭은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에 의해 파송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종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 따라서,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 53장의 종은 고난 받는 종이다.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은 거의 확실하게 이사야서 52:13(LXX)을 반영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 예언이 예수께 해당하고, 그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지적한다. 영화롭게 하심=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일컫는 말.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라는 구절은 누가복음에서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수난 예고(눅9:44; 18:32)와 수난 기사(20:20; 22:4,6,22,48)를 생각나게 한다. 본디오 빌라도는 AD 26-36년까지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관리였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내용은 누가복음 23:1-23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세 번이나 풀어주려고 했던 사건을 염두에 둔 말이다(눅23:4,16,22). 빌라도는 결국 사람들의 요구에 무죄한 예수를 넘겨주었다(눅23:24).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즉, 사람들은 예수를 넘겨주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2) 거룩하고, 의로운 이
거룩, 하나님께 붙이는 이름을 예수님께 붙이고 있다.
의로운 이 => 고난 받는 종의 다른 표현 사 53:11 메시아적 호칭.
14절
‘거룩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 소속된 자라는 의미(레 11:44-45)이며, 눅 1:35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면서 예수를 가리켜 사용한 표현이다. 예수에 대한 ‘거룩한 이’라는 호칭은 베드로가 시 16:10을 인용하는 행 2:27에서도 사용된다.
예수께 ‘거룩한 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현상이었다(요 6:69, 요일 2:20, 계 3:7, 막 1:24, 눅 4:34). 누가의 이 호칭도 이사야 52-53장에서 근거하고 있다. 거룩한 이는 구약에 하나님의 호칭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레 11:44-45, 시 77:41 LXX). 예수의 승천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분으로 보게 만든다.
‘의로운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을 부르는 호칭이다(사 53:11). 이 호칭은 행 7:52에서는 스데반이 사용하고 있고, 행 22:14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용하고 있다.
결국 이 표현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자라는 의미. 유대교에서 의로운 이는 메시아적 호칭이다(1 Enoch 38:2; 46:3, PsSol 17:32).
(3) 생명의 주 1) 바라바와 대조(살인자와 예수님을 대조)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15절
생명의 주’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바로 앞 14절에서 언급된 바라바와 예수를 대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바라바는 살인한 자이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16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예수를 목적어로 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예수를 통해서 생겨난 믿음을 가리킨다. 즉,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선포했을 때(6절), 날 때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에게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완전히 낫게” 구약에 나타난 제사에 쓰였던 표현 “완전히”
17절-18절
(1) 백성과 지도자들의 무지가 예수께서 죽으신 첫 번째 이유가 된다. (2) 두 번째로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신 이유는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에서 예언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였다고 베드로는 밝힌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계획(주권)이 균형 있게 설명되고 있다.
두 반응 ‘너희’ 백성들=> 회개함,
‘너희 관리들’=> 사도들을 체포함.
‘모든 선지서’가 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부활 후에 눅 24:26-27에서 자신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대한 예언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바울도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했다(행 17:2-3).
-행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4) 고난 받는 메시아라는 사상은 유대교에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구약에 고난 받은 의인(시 22, 시 69) 그리고 여기 13절에 암시된 이사야 53장 고난 받는 종의 사상이 초대교회가 염두에 두었고, 베드로가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사도들에게도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고난 받는 메시아라는 사상이 없었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난 받는 종(사 53장). 고난 받는 의인(시 22, 시 69)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질문: 나사렛 사람.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
베드로의 설교(2): 행동 촉구(19-26)
구약을 통한 경고와 회개 촉구(22-26), 적용 부분
패턴: 약속하고 경고한다.
약속: 죄 없이 함, 새롭게 함
경고: 멸망받으리라. 끊어질 것이다.
19절-21절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회개는 방향 전환, 돌이키는 것은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과 죄를 면제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회개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을 두 가지 동사를 사용해 설명하는데, ‘회개하다’와 ‘돌이키다’이다.
16절에서는 인간의 반응으로 믿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구절(19절)은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회개와 돌이킴이라는 동사로 설명한다. 초대교회는 복음에 반응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반응(믿음, 회개, 돌이킴)을 설명하는 다양한 표현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또, 죄 없이함도 유사어-19절)
회개하다와 돌이키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다. 첫 번째 동사 회개하다는 죄로부터 돌아서다를 의미한다. 두 번째 동사 ‘돌이키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다의 의미이다. 회개의 목적은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이다.
회개의 결과
부정적 측면: “죄 없이 함을 받는다”
긍정적 측면: “새롭게 함” 회복이나 휴식을 가리키는 단어.
<죄 없이 함>
“없이하다”(blot out Acts 3:19 evxaleifqh/nai )라는 단어, 파피루스, 파피루스에 썼던 글을 물로 지우는 표현. 죄를 물로 씻듯이 지워버리겠다는 의미
회개의 결과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를 없이함’이 주어진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의 결과는 ‘주께로부터 새롭게 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새롭게 함>(Acts 3:20 avnayu, xewj)라고 쓰인 명사의 동사 형태(anapsuxo to refresh)는 물을 마시고 나서 생겨나는 회복이나 휴식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삿 15:19, 삼하 16:14, 출 23:12, 삼상 16:23- 다윗의 음악 때문에 사울 왕이 쉼을 얻음).
*출 23: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특히 이 명사 단어는 칠십 인경에서 1회 사용되는데, 출 8:15(LXX)
22-23절
베드로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신명기와 창세기의 말씀에 호소한다.
22절에서 신명기 18:15가 인용된다. 이 신명기 본문 사도행전 7:37에서 다시 사용된다. 베드로는 신명기 18:15-19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5) 모세와 같은 선지자(메시아)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모세가 예언했는데 이제 그 예언이 예수에게서 완성이 되었다. 신명기 인용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신명기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며, 둘째 목적은 경고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는 레위기 23:29에서 나온 말이다.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면서(19절) 동시에 메시아를 계속 거부할 경우의 결과(23절)에 대한 경고를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눅, 행의 기독론: 『선지자 기독론』 예수께서 그 선지자다. 엠마오의 두 제자(선지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
(6) 아브라함의 자손: 베드로는 2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창세기 22:18(LXX) (참고, 창 12:1-3 LXX, 그러나 문자상 창 22장에 더 가까움)에 기초하고 있다. 창세기 22:18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16에서도 인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베드로는 바울이 했던 것처럼 ‘너의 씨’가 단수인 점을 강조하면서 메시야적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눅 1:55, 73; 행 7:5-6, 16-17).
26절
<그 종을 세웠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웠다는 구절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다는 의미로 성육신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같은 동사인 “세우다”가 선지자들을 세우다는 의미로 이미 22절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있음을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라는 말로 설명한다. 유대인들의 구속사적 특권에 대해서는 복음서와 바울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마 15:24; 롬 1:16; 2:10).
단수와 복수
“너희가 돌이킨다.” 공동체의 책임
“각각 버려라” 각 개인의 책임
3장 적용
적용은 쪼개 놓은 본문을 통합하는 것이다.
1.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광 받는 대상. 치유받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칭찬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영광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
2.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은과 금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초대교회는 예수밖에 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 말고 상담학, 문화 할 동, 체육활동..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자꾸 예수님 플러스알파를 찾는다.
3. 청중의 입장: 회개와 돌이킴, “약속과 경고” 둘 다를 듣고 있는가? 가끔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때가 있다.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 1) 의지(권리, 우리의 권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와 2) 순종(의무)
설교자는 약속만 선포해서도 안되고, 경고만 선포해서도 안된다. 균형 잡힌 설교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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