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
바울의 전도 사역이 에베소에서 보여준 영향력을 소개한다.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효과적인 사역의 원리를 보여준다.
<큰 그림>
19장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 도시에 가져다준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기록한다. 이 단락에서는 복음을 ‘주의 말씀’이라고 두 번이나 소개한다(10절, 20절). 그리고 이 주의 말씀이 에베소에 보여준 영향력을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소개한다.
행 19장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역의 성공을 전반부에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반부(23-41)에서는 복음에 대한 대적과 거부가 기록되고 있다.
복음의 영향력.
1) 복음이 외부에 영향력을 미친 사건: 스게와의 일곱 아들. 예수님의 기적이 단순히 이방 사람들이 행하는 주술과 같은 차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2) 내부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이 변화됨(18-19). 마술 책을 태움.
3) 23절 이하: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났다.
23절 이하의 복음에 대한 거부: 독특한 반대 운동이 나타남. “이방인들 스스로가 일어나서” 복음을 거부하였다. 유대인들이 선동하지 않음.
에베소 사역은 어느 지역보다 강한 복음의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저항과 대적의 힘도 컸다.
단락 구분
1-7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8-20 에베소에서의 바울 사역의 긍정적 영향력
21-41 에베소에서의 복음을 반대하는 폭동
1-7 세례요한의 세례만 아는 제자들과 바울의 복음전도
바울은 에베소에 와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제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세례요한의 제자로만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물론 누가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가리켜서도 그냥 ‘제자’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 ‘제자들’을 기독교인이 아닌 세례요한의 제자들로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참고, 눅 5:33; 7:18-19).
그러나 (1)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는 항상 믿는 성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2) 2절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에 언급된 ‘믿음’은 이들이 믿는 성도들임을 암시한다.. “믿다”는 동사는 사도행전에서 예수 믿는 사람임을 나타냄. 이들의 믿음에는 결핍이 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았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도 없고, 성령도 이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이들은 아볼로와 같이 예수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예수께서 가져오신 영적인 복의 일부분인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제자들의 대답은 성령 자체가 계심을 몰랐다는 의미라가 보다는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은 이미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해서 예언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1) 세례요한이 성령에 대해서 한 말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존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2) 성령은 유대교의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개념이기 때문에 성령이 계심을 몰랐다는 말은 성령이 오셨음을 듣지 못했다는 의미,(오순절 사건을 몰랐다)라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여기에 유일하게 두 번에 걸친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는다.
6-7절
제자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신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가시적 현상은 제자들의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즉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지향하고 바라보는 것임을 입증하는 사건이 된다.
마치 사마리아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주어지는 것과 같이(행 8:17), 바울도 바울의 안수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진다(행 19:6). 사마리아에서의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과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이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임하시게 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과 세례와의 관계는 사도행전에 일정한 패턴이 없다. 여기에서와 같이 사람들이 세례 받은 이후에 성령이 암하시는 경우도 있고, 세례 받기 전에 성령이 임하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참고, 행 10장- 고넬료).
8-9절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3개월간’ 그리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고 권면(설득)하면서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여기에 세 가지 표현으로 부정적 반응을 설명한다. (1) 마음이 굳어 있다 (2) 순종치 않는다. (3) 이 도를 비방한다. “마음이 굳어”(9절)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애굽의 바로왕(출 8:15; 9:35)과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신 2:30)에 사용되던 표현이다. 이 세 가지 부정적 반응은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철저하게 거부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토론하고 설득했지만 복음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이 전혀 회심자를 얻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운다”는 말은 회당에서의 복음전도를 통해 몇몇의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음을 보여준다.
회당을 떠난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복음을 설명한다. 두란노 ‘서원’(skole)은 강의할 수 있는 넓은 방(lecture hall)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학교 건물(school building)을 의미할 수도 있다. ‘두란노’(Tyrannus)는 이 건물의 주인이거나 혹은 선생의 이름일 수도 있다. 바울은 아마도 아침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참고 행 20:34).
사도행전의 서방 본문(the Western text)은 바울이 오전 11시~오후 4시까지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간은 더운 지중해 지방에서 낮잠을 자는 시간(siesta time)이다. 사람들이 한가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에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한 것이다. 지칠 줄 모른 바울은 오전에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오후에는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약 2년 동안을 두란노 서원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된다(참고 행 20:31- 3년).
이 사역의 결과로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된다. 계 2-3장에 언급되는 7 교회도 이 소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이다. 이 지역에서의 복음전도는 바울과 더불어 “에바 브라”(. 골로새교회를 세움,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파송되어 골로새에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가 복음이 확산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는데 참여하게 된다(몬 23. 골 1;7; 2:1; 4:12-13; 고전 16:19).
11-12절
바울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능력 행함을 통해 질병치유와 귀신 축출의 이적이 동반된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이적들이 대단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누가는 “놀라운” 능력(11절)을 사용한다. 에베소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지역이다(참고 13-14, 19절, 엡 1:15-23, 3:10; 6:12. 전신갑주를 입어라, 영적 싸움이 치열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술이 강한 지역에 이 보다 더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 주술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기적은 바울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이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라는 문장의 주어는 ’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주술과 기적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주술은 사람이 주문을 통해 신들을 조종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면 기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것이다. 바울이 행한 일은 병 고침과 귀신 축출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이미 예수께서 일으키신 것이고(눅 4:40-41), 베드로 또한 행한 일이다(행 5:16). 바울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을 닮아 있다!
13-16절 스게와의 일곱 아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무나 행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단락에는 바울의 복음을 믿지 않았지만, 바울이 행하는 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던 7명의 주술사(스게와의 일곱 아들)가 등장한다. 이들은 한 무리로 행동하고 있는데 사도행전에서 이것을 기록한 의도는 바울이 행하는 복음의 능력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술의 힘을 능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울과 7명의 주술사들의 그룹이 대조를 보인다. 복음을 섬기는 한 명의 사역자 바울과 귀신을 섬기는 7명의 주술사 사이의 강력한 대조가 그려지고 있다. 귀신 축출할 때는 정확한 이름이나 혹은 강력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요했다. 이 7명의 주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이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이름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17-19절 스게와의 일곱 아들 사건의 결과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사건의 결과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이 사건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에 경외심을 표하고, 특히나 귀신 축출과 관련된 예수의 이름을 사람들이 높이는 결과는 만들어 낸다. 특이한 것은 18절에 ‘믿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행한 일을 알린다는 대목이다. 이 구절은 믿는 자들의 종교혼합주의를 반영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즉 에베소의 성도들이 처음 믿을 때 주술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 신앙과 주술을 같이 행하고 있다가 점차적으로 주술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회개하며 주술을 청산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믿음이 가르침과 성령의 지도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그 책 즉 마술과 관련된 주문(spell)을 기록한 책을 모아다가 공개적으로(‘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는 일을 한다. 은 오만에 해당하는 값어치가 나가는 책을 불사른다. 은 오만의 화폐단위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당시 에베소에서 사용하던 흔한 화폐단위가 데나리온(denarri)이었기 때문에 은 오만은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137년(137x365=50,005 데나리온)을 일해서 모든 돈의 양이고, 백명의 가족이 50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는 양이다. 확실한 것인 은 오만이라는 숫자는 누가가 볼 때도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에 은 오만이라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이 에베소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음을 보여준다.
20절. 복음의 확산 요약함.
이 구절은 요약적으로 복음의 확산을 언급한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사건과 성도들의 혼합주의적인 신앙 정리 그리고 주술사들이 마술 책을 불사르는 일들은 복음이 힘 있게 확산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비슷한 요약문- 행 2:47; 6:7; 9:31; 12:34). 특히나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라는 표현은 에베소에서 주술의 힘과 싸워서 더 큰 힘을 발휘한 복음의 ‘힘’을 염두에 둔 말이다.
21-41 에베소에서 일어난 복음을 대적하는 폭동
21-22절. 바울의 계획.
바울이 예루살렘을 가기로 결심한 내용과 그동안의 경유지가 소개된다.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을 방문하고 그 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계획한다. 예루살렘 이후 로마를 방문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바울이 이 지역들을 방문하려는 계획과 관련해 “작정하여”라는 어구를 사용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어구는 문자적으로 “영 안에서(evn tw/| pneu, mati)” 계획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때 “영”을 (1) 바울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2) 성령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문맥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라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성령 안에서 계획했다는 의미” 그 이유는 바로 뒤에 나오는 어구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에 사용된 필연을 의미하는 1) ‘~해야 한다’(must, dei/)는 동사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된 단어이기 때문이다(행 1:16). 따라서 2) 바울의 여행 계획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 것임(행 20:22)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 사용된 ‘결심하다’는 동사는 바울은 이 지역 방문을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 결심이 성령이 허락하시는지를 묻는 과정을 밟은 것 같다(참고, 행 16:6-10/ 마게도냐인의 환상). 여기 언급된 바울의 여행 일정은 에베소를 출발해 (행 20:1) 행 21:17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마무리된다. 이때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은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연보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6:1-4; 고후 8-9, 행 15:25-32). 로마도 보아야 한다는 바울의 소망은 로마서 15:24, 32에 기록된 바울의 말과 일치한다.
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던 것처럼(눅 9:51; 13:33-34), 이와 흡사하게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는 계기가 뒤에 나오는 에베소의 폭동(23-41)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행 20:3절 부분에서 로마서 기록됨. 3차 전도여행 여정과 로마서 여정이 맞는다. 로마에서 스페인 가겠다. 로마서에서 구제 헌금 이야기를 했고, 여기서도 문맥상 구제 헌금을 가져갔다고 이야기함. 그러므로 예루살렘 방문 목석이 연보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신서 기록 순서: 갈, 살 전후, 고전 후, 로마서, 옥중서신, 목회서신
23-27
복음에 대항에 일어난 에베소에서 폭동을 기록하고 있다. 복음을 대적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동기가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입는 경제적 손실이었다(눅 16:1-14, 행 1:17-20; 5:1-11; 8:20-22, 16:16-18). 여기에서도 경제적 동기가 복음을 대적하는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신전 모형을 만들어 이익을 챙기던 데메드리오와 그 외 동업을 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경제적 동기가 사회, 종교적 명분으로 변장을 해서 기독교를 대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에베소는 당시 아데미 여신(로마식으로는 다이애나 Diana)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아데미(Artemis)는 풍요의 신이고 출산을 돕는 여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사냥의 신, 죽음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에 있던 아데미 여신을 위한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의 4배 규모였다!
28-34.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복음을 반대하고 있다.
이 폭동에 관한 기록은 기독교가 당시 사회에 평화를 무너뜨리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 이방 종교)이 평화를 깨는 장본인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복음을 대적하는 이 폭동은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 주체가 아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선동한 이방인들이 일으킨 폭동도 아니다. 유대인들의 개입이 없이 순수하게 이방인들이 독자적으로 복음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복음에 대한 대적과 다른 또 다른 점이다.
이 폭동은 당시 “우상의 신전지기”(35)였던 도시 에베소에서 일어난 복음의 영향력이 에베소의 문화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주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에베소에서 복음은 계층적으로 고위관리에게까지 퍼져가고(31절 “아시아 관리”), 엄청난 값어치의 주술 책을 불사르고(19), 심지어 신전 모형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와 관련해 장사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상황(23-27)까지 만들어 놓는다.
35-41
에베소에서 일어난 폭동은 복음을 위협하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이 폭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보호해 주신다. 이 사건의 경우 이방 세계의 ‘서기장’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기독교를 보호하는 일을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방인 서기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기독교를 보호하고 있다! 여기 언급된 ‘서기장’은 유대교의 서기관이 아니라, 이방 세계의 서기관이다. 이 서기장은 헬라 도시에서 귀족층에 속하는 사람으로, 기록과 등록을 관리하고, 신전의 회계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행 19장 적용
공정한 법집행을 하는 관리를 통해서도 기도해야겠다.
현대 사회에서 복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까?
효과적인 복음 사역의 원리. 영향력을 주는 복음 사역의 원리
1) 1-6절, 복음의 핵심 내용을 다 선포하라. 세례 요한의 세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성령의 약속. 복음을 풍성히 선포하라.
2) 8-10절.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함.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사역함.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굳었다. 이 상황에서 사람을 따로 세우고 2년 동안 날마다 복음을 전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사역하라.
3) 복음에 대한 대적과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신뢰하라.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복음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복음에 대한 저항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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