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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23장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바울

by 소북소북 202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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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25장  공회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 선 바울

누가는 7장 정도를 바울의 로마 압송 주제에 할애하고 있다. 1:8절 주제를 이루어 가는 과정 가운데 순탄치가 않았다는 내용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그의 이끌어가심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또 그의 로마 여정을 여전히 복음을 증거 하는 기회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차적 목적은 아닐지라도 누가가 문학가로서 초대 교회 내러티브를 기록하면서 독자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23:1-11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바울

비공식 모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특별히 고발할 것이 없어서 취소하면, 석방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로마 시민권자를 구금하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 바울이 서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생략되어 있다. 2절의 아나니아는 안나스와 다른 인물로, 주후 47년에 임명되었다가 58-59년에 해임된 사람. 52년경에 유대에서 큰 소동이 발생했는데, 로마 당국으로부터 이 소동의 주모자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가 대제사장직 수행하다가 해임 이후, 주후 66년에 친 로마파 라는 이유로 유대인 게릴라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침착하고 공정성을 보여주어야 할 대제사장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3절: 대제사장의 무례한 행동보다 이에 대한 바울의 행동이 더 놀랍다. ‘회칠한 벽아’ 는 그의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하면서 율법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도리어 율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그렇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했다기 보다는 바울의 선지자적, 예언자적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아니니아는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대제사장 역을 맡을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미 이 사람이 66년에 암살당한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건의 현장에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행전 전체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렇다.


5절: 출22:28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자기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한 말이 단순히 혈기를 못 참아서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여기서 냉소적으로(sercastic) 한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6절: 사헤드린 공회는 대부분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 신학적 노선 차별이 있다. 사두개인들은 친 로마적, 바리새인들은 암암리에 반 로마적인 입장을 더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도 달랐다. 사두개인은 보수적, 해석학적으로 모세오경을 문자적 해석함,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 해석함에 있어서도 새로운 해석 시도하기도 함.

 

이런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간의 부활에 관한 견해 차이가 있음을 바울이 알고 있어서, 죽은 자 들에 관한 부활에 관한 이슈를 꺼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겪는 어려움도 부활과 관련 있음을 이야기한다.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사람이 경험해야 할 일임을 바울이 얘기하고 있다. 바리새인의 신학적 입장을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7-8: 사두개인의 신학적 입장을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사두개인들이 천사와 영을 부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9-10: 일부 바리새인들은 바울에게 호의적이다. 바울은 다시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게 되고 유대인의 손을 벗어나, 여기서부터 로마인들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누가는 이런 얘기를 소개하면서 로마인들이 수감자의 안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여준다. 반제국주의적 정서를 띠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 지도자 각 개인의 잘못된 동기는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어느 쪽이 기독교를 대변하는 바울과 옆에 등장하는 유대인들과 처리하는 가운데 공정하게 하려고 하면서도 개인적 사리사욕 차리는 모습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잇도록 누가는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를 변증 하는 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죽지 않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 왕성하게 이루어갔는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승천하셔서 천상에서 어떻게 사역을 이끌어 나가셨는지 보여주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지만, 그것 외에도 이차적으로 기독교를 독자들에게 변증 하는 목적도 들어있다.

 

11: 그날 밤에
누가가 선택해서 11절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의 의도. 에베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어려운 사건을 당하고,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서서 언쟁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 앞으로 자기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고 위로해 주시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에 대한 거대한 비전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했었는데, 이틀 간의 폭력과 언쟁을 겪고 나서 바로 그날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앞날에 대해 안심을 시키고 계시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이끄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You must.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울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그날 밤에 하나님께 직접 듣는, 그래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바울의 신변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말씀이 사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약속을 해 주시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운데 있으면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갈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23: 12-30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

12절: ‘당을 지어’라기보다는 ‘음모를 꾸며’가 더 바른 번역. 여기서는 ‘συστροφή 수스트로페’라는 단어가 사용됨. 음모, 계략.
맹세(아나 떼마티조)- 저주 아래 두다.
자기들의 음모를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13-14절: ‘이 같이 동맹한 자는 ‘이 음모(수노 모시아)에 가담한 자’가 마흔 명이 넘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후대 랍비 문헌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음모에도 공조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보면 그런 가르침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15절: 그들의 음모 내용이다.

 

16절: ‘바울의 생질’: 원문엔 ‘바울의 누이의 아들’. 이 생질이 어떻게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어떻게 영내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가서 알릴 수 있었는지?
바울의 조카가 영내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면 바울을 살해하려던 사람들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 수감자의 친인척들은 그 당시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단순히 이 사건을 우연의 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진 사실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획 하에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음의 싸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누가가 이 단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포인트이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행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일을 하셔서, 일을 하시지만, 항상 그런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시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일부 비평학자들은 바울이 백 부장에게 지시하는 장면, 조카가 천부장의 손을 잡고 가는 장면이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이 음모가 로마 군대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로마에게는 팔레스틴이 굉장히 골치 아픈 지역이었다.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이 사람들에게도 이런 음모가 일어나는 것은 로마군대가 거기에 주둔하는 주된 목적과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한 로마 군대들이 이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20절의 번역이 약간 어눌함. ‘유대인들이 그(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내일 그를 공회로 데리고 와 달라고 당신에게 청하자고 합의했습니다.’

 

22절: 천부장의 반응과 그가 내린 지시.
천부장은 조카의 말을 직접 들으면서 이 사건을 총독, 자기 상관에게 회부할 것을 결정한 걸로 보인다. 로마 속주에 주둔한 로마 군대는 그 지역의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임무였기 때문에, 피의자를 사법적으로 처리할 권한은 사실 없었기 때문에, 상부에 회부했어야 했다. 물론 천부장은 바울을 그냥 석방시킬 권한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을 석방시킬 경우, 유대인의 원성때문에 더 어려워질 것을 알고 바울을 감금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유대인의 음모가 자기의 귀에 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23: 밤9시, 도합 470명의 경호 부대. 한 명의 죄수를 호송하기 위해 이 정도의 경호 부대가 꼭 필요했을까? 예루살렘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데, 보병과 창병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했다가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24절: 여기서 총독이 이름이 밝혀지는데 벨릭스 총독이다. 비문을 근거로 추정하는 벨릭스의 full name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펠릭스.
펠릭스는 본래 노예 출신이었다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가 주후 52년에 총독이 되었고, 세 번째 아내가 드루실라 (아그립바 1세의 딸). 벨릭스를 ‘노예의 마음으로 왕의 권력을 행사한 자’ 라는 평가도 있다. 총독으로 있으면서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부정부패, 포악했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25절: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세속적인 편지
누가가 이 편지를 읽어봤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누가는 그 당시 역사적 상황과 공문 형식을 따라서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기록했었을 스타일로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장르… 역사적 근거에 의한 내러티브이지만, 때로는 자기가 항상 근거 자료가 있어서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역사기록방법이 현대의 기록방법과는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평가하면 안 된다.

 

역사가로서 그 당시의 일어났을만한 일, 편지 등을 누가가 기록했을만한 것으로 기록할 수 있다. 누가의 이 기록이 역사적 허구라고 치부할 수 없다. 우리가 다 누가가 알아봐서 문서를 봐서 문서에 근거해서 기록했다 라고 말해야 성경의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 설교를 현장에서 다 들었다가 요약해서, 기록했어야 사도행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그것을 간접적으로 내용을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역사적 허구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방어가 필요한 것이 성경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누가라는 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지, 누가가 모든 것을 점검해서 기록했어야만 성경으로 받아들일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26절: 비로서 천부장의 이름을 알게 된다.
글라우디오-로마식 이름
루시아- 헬라식 이름

서신 내용을 보면, 사건 사실을 기록하고 잇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로마 군대 관점에서 보고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돼서 구해 준 것은 아니다. 자기들이 바울을 결박하고 결박 바로 직전에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고 구해준 것임.


31-33절: 예루살렘에서 안디바드리까지는 북쪽으로 약 60km.

안디바드리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보병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난 이후로는 영내로 되돌아오지 않았을까.
영지는 속주라는 의미.

 

사건이 발생한 곳이 자기 관할구역이기 때문에 이 케이스를 맡기로 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헤롯 궁은 원래 헤롯 대왕이 자기 자신을 위해 지은 궁전이 이 당시에는 로마 관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구금시키고 있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무고한 바울이 성난 유대인들과 자기들의 책임을 면하려고만 하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차분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11절에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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