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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26장 13-29절

by 소북소북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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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13-29절

13: 가장 태양빛이 강한 정오에 일어났다. 태양보다 더 강한 빛이 비췄다는 의미. 동행하는 자들도 다 인지할 수 있는 일이었음이 암시됨. 너무나 눈부신 빛이었기 때문에 모두 땅에 엎드러졌다. 앞에서는 바울만 땅에 엎드러졌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다. 이러한 디테일의 차이점이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9장, 22장, 26장 모두 마찬가지다. 역사적 사건을 누가가 다루고 있지만, 그 있는 사실 그대로 적어야 된다는 그것이 성경이라는 의미에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서는 바울의 눈이 멀게 된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바울이 그것까지 다 얘기할 필요가 없다.

 

바울이 그 내용은 생략하고 초점이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에 맞춰져 있다. 각 장의 포인트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는 주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내용이 있다. 성경이라고 해서 저자가 그 현장에 있어서 그 현장의 것을 다 듣고 적어야 하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제까지 행전에서 누가는 사울의 이름을 적을 때 헬라식 스펠을 적었다. (Saulos) 그런데 여기서는 사울아 사울아 는 (Saoul)이라고 다른 스펠로 적고 있다. 아람 어식 스펠이다. 세 군데 똑같이 이렇게 나온다. 9,22,26장. 그러면서 다른 말씀이 추가로 나온다.

 

 

14: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는 뜻. 이 표현은 원래 헬라어 작가들 표현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15:

9:5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존칭어로서 주여)
τίς εἶ, κύριε; ὁ δέ• ἐγώ εἰμι Ἰησοῦς ὃν σὺ διώκεις•
22:8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τίς εἶ, κύριε; εἶπέν τε πρός με• ἐγώ εἰμι Ἰησοῦς ὁ Ναζωραῖος, ὃν σὺ διώκεις.
26: 15 주여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스도인이 믿는 주로서 주여)
τίς εἶ, κύριε; ὁ δὲ κύριος εἶπεν• ἐγώ εἰμι Ἰησοῦς ὃν σὺ διώκεις.
바울의 논리는 예수가 하늘에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 분은 이미 부활하신 분이고, 승천하셔서 하늘 우편에 계신 권능의 위치에 계신 분임을 증명해 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6: 축약 기록
소명을 주시는 장면. 전에는 앞에서는 바울더러 도시로 들어가라 거기서 또 다른 지시를 받을 것이라고, 거기서 아나니아로부터 소명을 받는다. 여기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면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걸로 읽으려면 충돌이 일어난다. 이것은 누가가 그 사건을 축약을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그립바 앞에서 아나니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굳이 있었을까? 바울도 그 부분은 생략하고 소명받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지금 재판을 받아야 하는 삶을 살게 한 하늘의 음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가 네게 나타날 일- 내가 네게 나타나 보여줄 일들. 누가가 중요성을 인정하고 세 번씩 강조하고 있다. 소명이 강조되어 있다.

 

17: ‘구원하여’(엑사이루메노스)
너를 선택했다. 구출했다, 여기서는 구출했다는 의미가 더 가깝다. 어쨌든 여기서 로마에까지 갈 것을 확신시켜 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어’ 관계대명사 ‘후스, οὓς’
앞을 수식하는 관계대명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모두 다 수식하느냐, 아니면 이방인들만 수식하느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20절을 보게 되면 둘 다를 수식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항상 전도할 때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는 형식이 행전에 나오고 있다.

 


18: 구약적 표현. 여호와의 종의 소명을 묘사했던 언어를 바탕으로 기록된 신학적 표현. 아그립바 왕이 다 이해했겠느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더 쉽게 풀어 말했을 것이지만, 누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을 위해서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종의 노래. 초대교회가 깨닫고 여기에 반영한 것.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ㅡ그리스도가 고난 받는 종이 었고 지금 누가가 그와 비슷한 언어로 바울의 소명을 여기서 기록하고 잇는 것으로 보아 누가는 바울 또한 역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 a suffering servant로 바울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9-20: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원문: ‘하늘의 환상(옵타시아)을 내가 불순종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내가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이다. 왜 그런데 내가 고발당해야 하느냐는 이야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ἀπήγγελλον μετανοεῖν καὶ ἐπιστρέφειν ἐπὶ τὸν θεόν, ἄξια τῆς μετανοίας ἔργα πράσσοντας.)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회개하는 것의 차이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는 차이가 전혀 없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 회개의 주요성을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강조했다. 이신칭의만 그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을 경시한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위가 뒤따르는 믿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바울도 찬성하는 것이다.

 

21-22:
높고 낮은 사람들(원문에는 크고 작은 사람들)

구약성경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한 것을 말한 것 밖에 없다.


23절: 자기가 전한 그 메시지를 두 소절로 요약

  1.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 했다.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장, 이미 초대교회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본문으로 해석이 되었기 때문에)
  2. 이 메시아가 살아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빛이 되심

Isaiah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Isaiah 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Isaiah 60: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4: 베스도의 반응.


27: 선지자들(복수)- 구약의 선지자들. 아그립바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느냐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도 예수가 메시아로 올 것으로 예언한 것을 믿느냐는 의미.

 

28: 난처한 아그립바. 자기가 선지자들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믿지 않는다고 하면 신실한 유대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곤란해함.

 

29: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옥에 갇힐 만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마음과 결박을 당하는 것만은 제외하고. 바울의 복음을 향한 강한 의지와 열정이 엿보인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한걸음 현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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