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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4장 1절-31절

by 소북소북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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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31

단락 구분

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거 하는 사도들(1-31)- 사도들에 대한 최초의 핍박 사건

   사도들의 체포(1-4)
   공회의 재판(5-12절)과 결정(13-18)
   사도들의 대답 (19-20)과 공회의 위협(21-22)
   공회의 위협에 대한 교회의 반응: 담대함을 위한 기도(23-31)

2.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4:32-5:11)
   교회의 생활 설명(32-35)
   긍정적인 예: 바나바 (4:3637)
   부정적인 예: 아나니아와 삽비라(5:1-11)

 

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거 하는 사도들(1-22)

 

사도행전 전반부의 세 번의 핍박: 점점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

1) 4장: 위협(말로 하는 것)(4:21)
2) 5장: 채찍질(5:40)
3) 6-8장: 살해 스데반 순교

 

사도행전 4:1~12

누가는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치유 기적의 결과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치유 사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했다. 이제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치유사건에 대해서 설명한다.

 

4장의 설교는 지도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3장에서 백성들에게 선포했을 때는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붙잡고 위협했다. 복음을 거부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백성들은 회개했고, 리더들(산헤드린 공의회, 12지파 대표)은 거부했다. 그 자리에 12제자가 새로운 리더십으로 등장한다. 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사도행전 4장은 여러 면에서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의 유사점을 소개한다.


(1) 부활의 문제: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문제로
(2) 공회 앞에서의 심문:
(3) 구약 사용: 예수님 시 117:22절 인용, 베드로 시 118:22)


베드로는 11절에서 시 117:22(LXX, 한글성경 118:22)를 인용한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에서 지도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 시편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기록하는데(눅 20:17), 여기서 베드로 또한 이 시편을 사용하며 당시 지도자들을 겨냥해 말하고 있다.


(4) 종의 호칭: 행 4:27 “거룩한 종 예수”, 행 4:29 “종들로”(제자들)

→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은 사도들이 예수를 본받는 자들임을 암시한다.
제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줌. 제자는 예수님을 닮은 자들이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사도들의 체포(1-4)
초대교회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두개인들은 거의 없다. 부활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1-2절

<성전 맡은 자> 베드로의 설교 때문에 3시 제사 시간이 소란했기에
이런 소란을 가장 민감하게 바라본 사람은 ‘성전 맡은 자’였다. 그는 제사장은 아니었지만, 대제사장 다음 가는 지위를 누리던 사람으로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배와 성전을 지키는 군인들의 관리 담당하고 있었다.

 

이 ‘성전 맡은 자’의 지휘 하에는 다른 관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의 부대들을 관할했다. 이 부대들은 성전을 순찰하고 성전 문들을 지키며, 성전의 보물들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두개인들>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또한 몇몇의 ‘사두개인들’도 성전에서 사도들 때문에 일어난 소동 때문에, 솔로몬 행각을 찾아왔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상류 귀족층으로, 이들은 당시 대제사장 가문 출신들과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운영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 사두개인들은 성전 예배에 대한 방해와 소란 때문에 사도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도들을 반대하는 데는 종교적인 이유가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2절)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바리새인들>
당시 바리새인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었다.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통점이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사도들이 부활이 ‘예수 안에’(2절)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쳤다는 데 있다.

 

3-4절


성전 미문에서의 기적과 솔로몬 행각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는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어떤 이들에게는 믿음을 불러일으켰다(4절).

 

4절의 내용은 다소 애매하다.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라는 말은 베드로의 설교로 그 날 한꺼번에 오천 명의 남자가 회심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을 포함해 지금까지 성도들의 숫자가 남자의 숫자만 대략 오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오천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딱 한 군데가 있었다. 성전이다. 다 같이 모이는 장소는 성전이었고, 가정교회로 흩어져서 모였다.

 

공회의 재판(5-12절)과 결정(13-18)

5절

5절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을 말해준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가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회의를 주관하는 대제사장, (2)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3) 바리새인들 즉 서기관들이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관리들’은 제사장들(23절 참고,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4:5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을 가리킨다.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이 ‘제사장들’은 당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제사장과 제사장직에서 물러난 제사장들 그리고 이들 가문의 다른 가족들을 포함한다.
-‘장로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지도자 역할을 해 오던 전통 있는 가문의 수장들을 가리킨다.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성경을 필사하던 사람들 혹은 법률 전문가를 가리킨다.

 

6절-7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눅 3:2에서 함께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도 함께 기록되고 있다.

<안나스>
지금 대제사장 안나스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두 사도에 대한 심문을 주관하고 있다. 그는 AD 6~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다가 물러난 인물이다. 안나스는 엄밀한 의미로 그 당시의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난 사람이었지만, 사도들을 심문하는 회의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대제사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비록 대제사장직을 로마 정부에 의해 상실했지만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직은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가야바>
‘가아 뱌’는 안나스의 사위로 AD 18~36까지 대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사도들을 그 가운데 세우고>
산헤드린 공회는 회의가 소집될 때 반원형으로 마주 보고 앉아서 회의를 했다. 이때 심문을 받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서서 조사를 받았다. ‘사도들을 그 가운데 세우고’라는 구절은 이런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조사의 초점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였다. 이 질문은 치유가 일어나게 된 근원과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누가 20:2에서도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라고 물었다. 사도들도 예수께서 받으신 것과 비슷한 심문을 받고 있다.

 

8절

<성령 충만하여>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한다. 이런 담대함의 원인은 그의 ‘성령 충만’ 함에 있었다.
누가는 이 표현(“성령의 충만으로”)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주요 인물들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한다(눅 1:15,41,67; 4:1; 행 2:4; 4:31; 6:3,5; 7:55; 9:17; 11:24; 13:9). 여기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진 결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다(참고, 행 1:8).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를 향해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이라고 부른다. 이 구절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베드로가 지금 사두개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변호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관들(5절)이던 바리새인들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 참석하고 있지만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이 아닌 사두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증언을 하고 있다.

 

9-10절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9절에서 베드로는 이 사람의 치유와 관련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으로 치유와 구원을 연관시키고 있다. 이때 베드로가 사용한 ‘구원’은 영적 구원을 의미하기보다는 넓은 의미로 육체의 치유를 의미한다. 실제로 베드로는 바로 다음절인 10절에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9절의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다.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공회의 질문(7절)에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10절)고 밝힌다. 치유의 기원과 권위가 예수께 있음을 성령충만한 사도들이 담대히 증거하고 있다.

 

11-12절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하나님의 반응 두 가지를 서로 대조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건축자들의 버린 돌 vs (하나님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

 

<시편 인용>
베드로는 11절에서 시 117:22(LXX, 한글성경 118:22)를 인용한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에서 지도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 시편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기록하는데(눅 20:17), 여기서 베드로 또한 이 시편을 사용하며 당시 지도자들을 겨냥해 말하고 있다.

 

12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이름’은 인물(인격)과 능력을 상징한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이란 예수라는 인물(인격)을 의미한다. 예수 이외에는 천하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하나님의 메시아는 없다(=구원 방식의 배타성).

질문) 여기서 구원은 단지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인가? 예수의 이름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4:13~22

개요

본 단락은 두 사도들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 그리고 이 판결에 대한 사도들의 대답을 다루고 있다. 사도들의 담대함에 대해 산헤드린 공회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두 사도를 위협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만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내용과 연관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21:15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이 예언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사건을 통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절별 주해

 

13절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8절에 의하면 베드로만 말을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13절에는 요한도 공회 앞에서 증거 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담대하게>
13 Qewrou/ntej de. th.n tou/ Pe, trou parrhsi, an kai. VIwa, nnou
두 사도는 ‘담대하게’ 대답을 했다. 이 초대교회는 이 ‘담대함’을 위해 기도했으며(29,31절), 또한 ‘담대함’은 초대교회가 하는 선포의 특징이었다(13:46; 14:3; 18:26; 19:8; 26:26; 28:31). 담대함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자유인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4:29)인 사도들이 이 담대함을 누린다. 역설적인 담대함이다!

 

<학문 없는 범인>
Acts 4:13 kai. katalabo, menoi o [ti a;nqrwpoi avgra, mmatoi, eivsin kai. ivdiw/tai(
(1) avgra, mmatoi, 문맹인, (2) ivdiw/tai 전문적 훈련을 받지 못한,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인

산헤드린 공회는 두 사도가 원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들의 담대함에 놀란다.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은 두 사도가 글을 읽지 못하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공식적인 바리새파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4절-15절


<함께 서 있음>
공회원들은 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이 두 사도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본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이다. 지금껏 앉아만 있던 사람이 이제 두 사도 곁에 서 있다는 사실은 공회원들로 하여금 기적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로 작용한다.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공회원들은 이 표적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비난할 말을 찾지 못한다.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의 구절에 쓰인 비난이라는 말은 누가복음 21:15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antilegw)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누가복음의 예수 예언과 제자들의 선포를 관련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 예수님의 예언대로 변박할 수 없게 말과 지혜로 공회원들에게 대답하고 있다.(예언과 성취의 패턴)

 

18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주동한 산헤드린 공회에게 적대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 공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들은 친 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람이나 운동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 사도들이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일은 이들에게 정치적으로 불안한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지 못하도록 위협한다.

 

사도들의 대답 (19-20)과 공회의 위협(21-22)


19절-20절

이 두 구절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 대한 사도들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13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대답했다고 하는데, 이제 19절에 와서 그 담대함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설명해 준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산헤드린의 권세에 순종을 비교하며, 담대하게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산헤드린의 명령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보고 들은 것>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할 것이라고 용기 있게 산헤드린 공회에 맞선다. 증인의 전제 조건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역사적 확실성을 갖는 것이었다. 행 1장의 강조점은 부활의 사실성과 승천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21절

<백성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의 관리들은 ‘백성들’의 의견과 평가 때문에 사도들을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이미 백성들 중 일부는 성전에서 벌어진 치유 기적을 목격했다. 또 일부는 오랜 기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병자가 건강하게 되어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소문은 예루살렘에 삽시간에 퍼져 이 치유 기적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16절). 백성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는 자신들 뜻대로 사도들을 처벌할 수 없게 된다.

 

누가는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복음서에서 기록했다(눅 19:48; 20:6,19,26; 21:38; 22:2). 여기에서도 누가복음에서 보여주었던 백성들과 지도자들 사이의 이런 관계를 볼 수 있다.

 

*두 종류의 리더십
산헤드린 공의회의 리더십: 백성의 눈치를 보는 리더십,
열두 사도의 리더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리더십.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사람.
다양한 목소리가 있을 때 어디에 귀를 기울이는가? 사람의 목소리인가? 하나님의 목소리인가?

 

22절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의 나이에 대해 언급한다. 사십여 세가 되었다는 말은 이 사람이 사십여 년 동안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말이다(행 3:2). 치유 기사에서 많은 경우 치유 기적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신약의 저자들은 병이 걸린 기간을 언급한다(막 5:25;9:21; 요 5:5; 9:1). 누가도 이런 습관을 보여준다(눅 8:43; 13:11; 행 9:33).

 

공회의 위협에 대한 교회의 반응: 담대함을 위한 기도(23-31)

 

23절


<그 동료들에게 가서>
산헤드린 공회의 조사로부터 풀려난 사도들은 ‘그 동료들’에게 간다. 여기 동료들은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료 사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23-31절까지의 내용은 교회가 함께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도들이 함께 기도했다는 배경을 설정해 준다. 두 사도들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과 위협을 전한다.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이 이 기도회의 특징이다.

 

1) 대주제여,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이시오- 세상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
2) 산헤드린 공의회의 대적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공의회의 위협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행 4:26
3)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행 4:28)

지금 위협의 상황, 핍박의 상황이다. 교회의 고백은 이 상황도 하나님께서 컨트롤하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위협도 하나님께서 통제하십니다라는 믿음의 기도였다.

 

<23절-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앞 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의 위협적인 말을 동료들에게 전한다.

 

24절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사도들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들은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1) 모든 사도가 같은 기도의 내용을 큰소리로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2) 한 사람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나머지 사람은 아멘 하며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25-28절


<시편 인용>
누가는 여기서 시편 2:1-29(LXX)를 인용한다. 누가의 의도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도들에 대한 관리들의 박해는 이미 하나님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다윗의 시편으로 입증하려는 것이다.

 

-25-26절은 누가가 24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주권을 구약을 통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이다. 사도들이 당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누가는 밝힌다. 누가는 줄곧 하나님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해 왔다(눅 24:44; 행 1:16; 2:25,30-31).

 

-초대교회에서 시편 2편은 메시야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시편 2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이 시편의 다른 상세한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연관 지어 해석이 되었다. 여기 사도행전 4장 25-26절은 앞에서 말한 예수의 생애와 고난의 상세한 것까지를 예언하는 것으로 시편 2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군왕들’(26)은 헤롯과 동일시되고 있으며(참고 막 6:14), ‘관리들’(26)은 본디오 빌라도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열방’(25)은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인들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족속들’(25)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구절은 헬라어로 백성들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 이런 연결이 가능한 이유는 25-26절에 인용된 시편 2:1-2의 내용이 실제로 27절에서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다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27)은 원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복수 형태로 백성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이 이스라엘 전체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누가의 의도와 관련이 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책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2:23, 36; 3:13-14). 그러나 현재 문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각자 개인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거룩한 종>
-누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26)이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종’(27)이라고 말한다. 메시아인 예수는 시편 2편에 예언된 그리스도(메시아)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지만, 이 역할을 이사야 42:1 이하에 예언된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통해 메시아의 임무를 수행하실 분이라는 이해가 ‘거룩한 종 예수’(27)에 들어있다.

 

-28절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순 없이 잘 표현되어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2) 인간의 책임;

 

백성들과 로마 정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사건은 단순히 인간들의 결정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권능과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29절-30절


이제 사도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안전과 복음 선포를 위해서 기도한다.
(1) 25-2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__에 관한 내용이었다.
(2) 이 단락은 사도들의 고난으로 초점이 바뀐다.

용기를 위해 기도함.

 

31절


<담대히 전하니라.>
사도들은 성령 충만을 받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29절). 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31절은 밝힌다.
진동=> 하나님의 임재.

 

1.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백성의 목소리? 하나님의 목소리?/ 산헤드린 공의회의 목소리?

2. 핍박 앞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진리이다.

 

3. 핍박 가운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은 기도이다.
   용기는 주님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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