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4:32-5:11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단락 구분
교회의 생활 설명(32-35)
긍정적인 예: 바나바 (4:36-37)
부정적인 예: 아나니아와 삽비라(5:1-11)
본문 자체가 세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발 앞에” 35절, 37절, 5:2절로 보여준다.
교회의 생활 설명(32-35)
누가는 초대교회의 생활을 사도행전 2장 42절~47절에서 요약적으로 설명했다. 누가는 다시 한번 이 초대교회의 생활을 설명한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한마음과 한 뜻이 되는 ‘연합’이었다(32절). 이 연합은 소유를 나누어 주는 것(구제)으로 나타났다.
<33절 증언하니>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을 33절이 보여준다.
<35절- 발 앞에 두니>
성도들은 밭과 집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35). 이 구절은 사도행전 2:42~47과 분명히 다른 점이다. 이전에는 구제가 개인이 개인을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이제 4장에 이르러서는 구제가 좀 더 조직화되어 사도들이 구제를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 발아래 두다는 말은 ~의 주관 하에 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수 10:24; 삼상 25:24, 시 8:7; 109:1; 눅 7:38, 8:35, 행 10:25; 22:3).
수 10:24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삼상 25: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시 110:1(109:1, LXX)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긍정적인 예: 바나바 (4:36-37)
37절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이며 전도여행의 동행자였던 요셉/바나바에 대한 소개를 이곳에서 하고 있다.
바나바의 이야기는 초대교회에서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그 값을 사도들의 권한에 두었다고 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전문맥: 구제의 예 설명
후문맥: 바나바의 앞으로의 사역을 예고
바나바의 출신, 지파, 별명이 소개되고 있다.
(1) 출신: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난 사람이다.
구브로에는 알렉산더 대제 시대를 기준으로 그 시기 전후에 유대인들이 이 섬에 있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BC 1세기 초에 유대인들이 구브로 섬에서 번성했다.
-필로도 이 섬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AD 1세기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그 섬 전역에 퍼져 있었다고 기록한다.
안디옥 교회가 가장 먼저 바나바와 바울을 구브로로 파송했다. 고향으로 먼저 보냈다. 행 13:3-4
(2) 지파: 구약에서는 레위족은 하나님이 유업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기업이나 분깃이 없었다(신 12:12; 14:29; 수 14:3, 4; 18:7). 그러나 여호수아 21:1-41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에 속해 있는 땅의 일부가 주어졌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신약시대에 레위지파 가문의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3) 별명: 요셉은 사도들에 의해서 바나바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바(bar)와 나바(nabas)가 합쳐진 이름이며, 나바(nabas)는 (1) 아람어로 ‘화해’ 혹은 ‘위안’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파생되었든지, 아니면 (2)‘예언하다’(to prophesy)를 의미하는 단어(nb)에서 나왔을 수 있다.
예언자의 아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 그중 한 기능이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을 통해서 사역을 했다. “위로의 아들, 화해의 아들, 예언자의 아들.”
예언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권면과 위로였기 때문에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로 번역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누가가 바나바를 ‘위로의 아들’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이며,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행전에서 그가 수행하는 역할과 그의 인품을 미리 암시해준다.
위로의 아들바인 바나바는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9:27; 11:22, 30; 12:25).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중재 역할, 안디옥 교회가 구제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냄.
바나바와 사도들의 관계.
바나바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 일컫게 되었다. [이름이 ~라 일컫게 되다]는 이름을 수여한 사람과 수여받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름을 수여받은 사람은 이름을 준 사람과 종속적인 관계, 권위의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름을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도들의 권한아래에 두다는 말로, 밭 값을 사도들이 맘대로 할 수 있게 둔다는 의미이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다’는 표현은 바나바가 사도들과 유지하고 있던 관계를 또한 보여준다. 즉 바나바는 사도들의 권위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과 장로(11:30)가 있었다. 아마도 바나바는 장로 그룹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예: 아나니아와 삽비라(5:1-11)
5:1-2
이제 누가는 바나바의 이야기와 대조를 보이는 부정적인 예를 하나든다. 사도행전 4장 32절~37절에 묘사되었던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에 급제동을 거는 이야기이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나바와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바나바처럼 이들은 소유를 팔았다. 그리고 바나바처럼 이들도 이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러나 차이점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점이다(2절). 여기 ‘감추다(Acts 5:2 evnosfi, sato)’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절과 3절에서 사용되고, 또한 디도서 2:10에서만 사용된다.
‘감추다’ 구약에 딱 한 번 나온 단어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 의도성이 있는 단어이다. 아간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아간 사건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린 사건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으로 교회 전체의 연합이 깨어지게 하는 교회에 위협을 가하는 사건이었다.
딛2: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이 단어는 또한 여호수아 7:1(LXX)에서 아간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물건을 ‘감춘’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용된 동사이다. 누가는 흔치 않은 이 동사를 사용해서 두 사건을 연관 지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아간이 여리고성의 물건을 훔친 사건과 같은 성격의 사건, 하나님의 공동체를 심각한 위기에 빠트린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5:3~4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잘못을 알게된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대면하여 그를 책망한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일은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초대교회에서의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은 쿰란 공동체(강제적)의 생활과 흡사하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의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일은 규칙에 의한 강제적인 것이었다면, 초대교회의 구제는 규율에 의한 강제적인 활동이 아니었다. 성도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누가는 이런 자발적인 구제활동을 가리켜 ‘땅이 그대로 있을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라고 한다.
3절- 사탄과 성령
누가는 이 구절에서 사탄과 성령을 대조시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탄의 조정에 의해 결국 성령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누가는 가룟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를 배반했다고 말했다(눅 22:3-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와 흡사하게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와(‘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4장 32절이 교회의 하나됨으로 시작된다.
5장에서는 사탄이 교회 내부의 사람을 유혹해서 교회를 공격한 것이다. 사탄이 아나니아를 통해서 교회에 위협을 가한 사건이다.
5장 후반부(17), 교회 외부(산헤드린공회)에서 교회를 공격한 사건. 교회의 하나됨을 공격, 교회의 평판을 공격.
이 패턴이 9장까지 진행된다. 내부에서, 외부에서.
“사탄의 공격” 눅 22:3 “누가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공격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교회를 공격했다.
4절- 어찌 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계획 끝에 일어난 사건임을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라는 구절이 분명히 보여준다.
이들의 속임수는 성령을 속이고(3절)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4절)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초대교회의 하나됨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교회를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의 공동체로 봤다는 것이다. 인간의 공동체로 본 것이다. 5장의 내용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 공동체라는 것을 깨우치는 사건이다.
5:5~6
베드로의 말을 듣던 아나니아는 땅에 쓰러져 죽는다. ‘혼이 떠나니’(evkyu,cw)라는 동사는 사사기 4:21(칠십 인경)에서 시스라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사용된 단어이다. 또한 헤롯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누가가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12:23).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자로 묘사된다. 아나니아와 헤롯의 죽음.
아나니아의 죽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 아나니아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가져다준 영향과 삽비라의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이 5절과 11절에 기록되어 있다.
11절에서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있어 여기 5절의 ‘모든 사람들’은 성도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 따라서 5절의 이 일을 듣는 사람들도 성도가 아닌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가 어떤 공동체임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다. 교회를 인간의 모임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5:7~11
삽비라는 자기 남편의 죽음을 모르고 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베드로와 만나게 된다. 당시 남편의 죽음을 가족 특히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장사한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는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당시에 시체는 빨리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사된다는 것은 난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 아나니아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죽음임을 생각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일상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고 아나니아의 시체를 장사한 것이다.
(2) 또한 아나니아의 시체를 젊은이들이 ‘싸서 메고 나가’라는 설명은 시체는 예루살렘에 밤새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 풍습에 근거해 해가 지기 전에 예루살렘 밖 무덤에 장사 지내려는 조치였다.
예루살렘 성벽 바깥쪽에는 동굴로 된 무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땅을 파지 않고 동굴 속에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무덤 형태는 아나니아의 장사가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게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책망의 말을 던진다. 베드로가 한 책망의 말과 함께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표현된 자기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삽비라는 자기 남편처럼 ‘혼이 떠난다’(10).
10절의 ‘베드로의 발 앞에’라는 표현은 상징성이 강한 표현이다.
이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는 감추고 재산 일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러나 이제 자기 소유 값의 일부가 아니라, 삽비라 그리고 아나니아는 자기 목숨 전부를 ‘베드로의 발 앞에 두게’ 되었다. 재산의 일부를 바치려다가 자기 목숨 전부를 바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보여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
교회를 일반 사람들의 공동체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한 거짓말은 하나님과 성령을 속인 것, 그들 눈에는 하나님도 성령도 안 보인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11절 교회와 불신자가 두려워했다.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임을 심각하게 자각했다. 5절에서는 교회 밖의 불신자가, 11절에는 불신자와 신자들이 함께.
<행 4:1-5:11적용>
5장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회 일반 모임 정도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교회 정치하시는 분들, 교회를 자기 이권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고전 11장:17~, 성만찬의 문제, 고린도 교회는 성찬 식에 문제가 있었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리고 식사 후에 성만찬을 했다. 이것을 일반 식사로 생각해서 격이 같은 사람들은 집 안에서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뜰에서 먹었다. 이것을 보면서 바울이 화를 냈다. 주의 몸을 기억하면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성찬식인데,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분류하고 있다. 고전 11:30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죽었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문제는 주의 만찬을 일반 식사로 격을 내린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교회에서 하나님과 성령을 못 보는 일반 사회 모임으로 전락시켰을 때, 죽음을 맞이했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성전은 문맥상 교회 공동체이다. 성전을 멸하면 하나님이 멸하시니라. 교회를 잘 생각하라. 교회를 사람의 모임으로.. 내 밥벌이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나.. 하나님의 공동체를 사람의 공동체로 타락시킬 때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멸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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