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2- 42
단락 구분
사도들의 기적과 교회의 계속적인 성장(12-16)
사도들의 체포(17-42)
체포와 2차 심문(17-28)
산헤드린의 심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29-32)
가말리엘의 조언(33-40)
결과 (41~42)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외부적인 위협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산헤드린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예수를 죽이도록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을 책잡는 것이라 보고 사도들을 체포하여 2차로 다시 심문한다. 이들은 예수를 체포했을 때처럼(눅 22:6) 사람들 사이에 소동이 없도록 사도들을 조심스럽게 체포한다(행 5:26).
12-16 사도들의 기적 행함과 교회의 계속적 성장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6절 예루살렘 부근, 즉 유대지역까지 복음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12절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들이 일어난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라는 구절은 단순히 사도들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라고 해석될 수 있다. 기적을 일으킨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손을 얹어 병자를 낫게 하셨다(막 6:5등). 누가는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사도들이 손을 얹어 병을 고쳤다고 이야기한다(3:7; 9:12,17,41; 14:3; 19:11; 28:8).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는 누가가 베드로를 통하여 설명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관련된 현상이며(행 2:19), 사도들의 기도한 내용이었다(행 4:30). 성전 미문의 병자를 고친 사건이 치유 기적의 첫 번째 이야기였는데, 이제 이 대목에서 사도들이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말한다.
믿는 자들은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아마도 솔로몬 행각에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했던 것 같다. 누가가 여기에서 솔로몬 행각을 언급해 이 단락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적 행함과 행 3:11의 기적 행함을 관련지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고, 또한 행 5:22의 장소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헬라어 원문에는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문장에서 주어인 ‘믿는 사람’ 대신에 단순히 ‘그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설명이 되는데 이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다 (행 4:32). 따라서 ‘그들’은 다름 아닌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13-14절
이 두 구절은 사람들이 믿는 자들에게 보인 두 가지 태도를 밝혀준다. ‘그 나머지’는 믿는 사람들의 일부를 가리키지 않고, 믿는 사람을 제외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믿지 않는 자들은 감히 믿는 사람들의 무리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런 믿지 않는 자들의 주저함은 14절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들이 믿는 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존경심을 달리 표현한 것“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이다.
믿는 자의 무리에 감히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그럼에도 회심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14절에서 누가는 설명한다.
13-14절이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종하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교회에 대한 존경심”을 의미하기에, 그렇기에 그 모임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왔다.
초대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누가는 ‘남녀의 큰 무리’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누가는 남성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언급을 빼지 않고 하고 있다. 남성과 함께 여성을 언급하는 것은 누가의 특징이다(행 1:14등).
15절-16절
베드로가 사람들의 초점의 대상이 된다.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면 병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람들이 하는 미신적인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누구를 덮는다는 것은 그림자의 주인인 그 사람의 영혼과 접촉한다는 것이며, 더 좋게 되던 혹은 더 나쁘게 되던 그 영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그 당시 대중적인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에 나온다고 다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 대중적인 신념에 근거한 미신적인 생각이다.
16절에는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모여든 사람들의 출신지역을 설명하다. 이들은 ‘예루살렘 부근’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데, 이들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지방까지 퍼져나가는 통로가 된다. 누가는 16절에서 치유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병든 사람’이고 다른 부류는 ‘더러운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는 사람’이다. 병든 사람은 자연적으로 병이 걸려 아픈 사람이고, 후자는 귀신에게 사로잡혀 병이 든 사람이다. 누가는 병을 모두 다 귀신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28 체포와 2차 심문
17절-18절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산헤드린 공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제사장이 사도들에 대해서 ‘시기’가 가득했다.
(1)‘시기’는 사도들로 인한 교회의 성장에 대한 질투를 의미할 수 있다. 누가는 이 ‘시기’라는 단어를 사도행전 7:9에서 요셉의 형제들에 대해서 사용하고, 또한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에게 사용한다(행 17:5). (2) 또한 이 ‘시기’라는 단어는 ‘종교적 열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열심히 유대교를 위협하는 사도들을 체포한다.
19-21절 상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당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구해낸다. 주의 천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눅 1:11, 26; 2:9,13; 22:43; 24:23; 행 8:26; 10:3,7,22; 11:13; 12:7-15,23; 27:23). 천사는 이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말한다. ‘성전’은 많은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로 한 장소이기 때문에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생명의 말씀’(20)은 바울이 말한 ‘이 구원의 말씀’(행 13:26)과 같은 표현이다. 시리아어에서 구원과 생명은 같은 단어로 번역된다.
사도들은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친다. 이른 아침 즉 해가 뜨기 전에 성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성전의 일과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새벽에도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1하
산헤드린 공회는 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해 모인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이미 17절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당파를 가리킨다. 이들은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은다. 누가는 두 단어가 하나의 개념이나 대상을 나타내는 hendiadys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공회와 원로들’은 결국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인 산헤드린을 의미한다.
산헤드린 구성원들이 다 모였다는 말은 이들의 판결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일부의 결정이 아님을 의도한 것이다. 여기 모인 산헤드린에 바리새파가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의 등장으로 확인이 된다(34절).
22절-28절
23절은 주의 천사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이 옥에서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닫았음을 보여준다. 옥문을 지키는 자들은 옥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몰랐다. 이런 사실은 사도들이 옥에서 구출되어 나온 사건이 초자연적 사건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중에 가말리엘이 사도들과 관련하여 이 사상과 소행이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이라고 말하는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성전 맡은 자와 부하들’은 사도들을 강제적인 방법이 아닌 평화로운 방법으로 체포한다(26절).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금지한 이유를 사도들이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기’ 때문이라 밝힌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도록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켰다고 전하는(행 4:10) 사도들의 활동은 결국 예수를 죽게 만든 산헤드린 공회가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29-32 산헤드린의 심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
29-31절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 앞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으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행 4:19).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것을 변호의 기회로 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말함으로써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28절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지적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는 지적에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의 직접적 책임을 말한다.
예수가 죽은 장소를 ‘나무’라고 한 것은 누가가 예수의 죽음을 신명기 21:23의 빛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명기 21:23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이다. 이것이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였다.
그러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로마인들과 그 배후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로 몰아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셨다.’ 이것은 승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를 승천하게 하셨다. 승천의 결과는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것이다.
(1) 임금이라고 번역된 것은 행 3:15에서 ‘주’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이 단어는 행 7:35에서 모세를 설명하며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행 7:35에서는 관리 혹은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구주’라는 호칭은 사도행전에서 이곳이 첫 번째로 사용되는 구절이다.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의 기회가 주어진다. 사도들과 성령은 예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다. 특히나 성령이 증인이라는 뜻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이 예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며, 또한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사실임을 입증한다는 의미이다.
33-40 가말리엘의 조언
33절
사도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대답에 산헤드린 공회는 분노하여 이들을 죽이려고 한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산헤드린 공회가 책임이 있다는 말(30절)과,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해야 하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베드로가 말한 점(31), 마지막으로 성령을 증인으로 주셨다는 말이 이유가 된다. 사두개인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믿지 않았으므로 성령을 증인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은 이들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기에 심기가 불편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산헤드린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로마인들의 손에 이들을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34절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공회 앞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자기의 의견을 펼친다. 여기에 소개된 가말리엘은 역사상 여러 명의 같은 이름을 가진 랍비 가운데 가말리엘 1세이다. 그는 온건파에 속한 랍비 힐렐의 후예인 듯하다. 바울은 이 가말리엘을 자기의 스승으로 두었다고 말한다(행 22:3).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이 공회는 예수를 죽도록 판결을 내렸다(눅 22:2). 그러나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도 있었으며(눅 7:36; 11:37; 14:1), 사도행전에 의하면 어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15:5; 23:6). 사두개인들보다는 바리새인들이 초대교회의 믿는 사람들과 많은 점에서 유사했다. 특히 부활과 초자연적 존재(천사)에 대한 믿음과 가르침은 바리새인과 기독교인들이 사두개인들과 기독교인들보다 흡사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35~39절
가말리엘은 두 가지 역사상의 예를 들어 예루살렘 공회가 사도들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예는 ‘드다’이며, 다른 예는 ‘갈릴리의 유다’이다. 요세푸스는 AD 44-46년경에 반란을 일으킨 드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헤롯이 죽을 당시에는 수많은 반란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는 드다는 요세푸스가 말하는 드다가 아닌 알려지지 않는 또 다른 드다였을 것이다.
가말리엘이 말하는 ‘갈릴리의 유다’는 ‘호적할 때’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누가는 기록한다. 이 사람은 AD 6년에 아켈라우스가 면직되고 로마인들이 유대를 직접 통치할 때 있었던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의 호적조사에 대항한 사람이다. 두 인물은 사람들을 모아 위협적인 모임을 만들었지만, 이들이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져 버렸다.
따라서 기독교의 지도자인 예수가 죽고 없으므로 기독교가 사람에게서 난 일이면 그의 추종자들도 결국 뿔뿔이 흩어져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가말리엘이 말하는 것이다. 가말리엘의 조언은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38). 가말리엘은 ‘사람으로부터 난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을 대조한다.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생각한 공회는 그의 조언을 따른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은 누가의 독자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39) 일을 하고 있다고 알게 된다.
40절
공회는 사도들을 죽이기로 시도했지만, 가말리엘의 조언에 따라 ‘채찍질을 하고 더 나아가 첫 번째 심문에서처럼(4:18)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채찍질은 사형보다는 덜한 처벌이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40대(신 25:2 이하)에서 하나를 감한 39대를 때렸다(고후 11:24). 한 대를 줄인 이유는 잘못해서 40대 이상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채찍질은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어서 기록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채찍질당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b. Makkoth 3.14).
41-42 결과
누가는 41절~42절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시 한번 요약해 기록한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놓이면서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쁘게 여겼다. 사도들은 누가복음 6:22-23에 나오는 주 예수의 말씀인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를 성취하고 있다.
사도들은 공개적인 자리(성전)에서나 비공개적인 자리(집)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가르치기를 계속한다. 산헤드린 공회의 채찍질과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고(29절) 복음을 전파한다.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의 이런 가르침은 계속해서 사두개인들과의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인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가르침은 주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기 때문에 부활 사상을 거부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복음
1) 그리스도: 유대인 대상 전도
2) 주(Lord): 이방인들에게 선포할 때
적용(알고 있는 진리를 새롭게 적용하는 것이다. 성도를 향해, 교회 공동체에 초점을 가지고 적용)
고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면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고난은 복음 전도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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