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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1장

by 소북소북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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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

단락 구분

1-3 배경: 논쟁-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

4-17 베드로의 변론

18 반응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조건 없이 받아들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베드로에 대한 비난은 결국 조건 없이 성령을 이방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강림 사건을 유대인들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은 사건으로 설명한다.

1-3 배경: 논쟁-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

1~3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했다는 소문은 <유대지방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진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2절에 나오는 할례자들과 구별되는 무리로 보고 사도들과 일반 성도들(형제들)과 별도의 무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사도들과 형제들’이라는 구절은 유대지방의 모든 성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절에서 언급되는 할례자들이 이방인들과의 교제 때문에 베드로를 비난한다. ‘유대의 형제들’은 할례를 받은 성도들이며 이 시점까지는 이방인으로서 할례 받은 자가 없기 때문에 여기 언급된 할례자들을 유대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에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한 적이 있다(행 6:14). 이제 유대지방에 있는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이 전에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것처럼 복음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누가는 언급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이 일 때문에 비난받는 일이 생긴다.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여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탁 교제를 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선다. ‘할례자들’은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

 

<비난하여>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식탁 교제한 것을 두고 그를 비난한다. 여기 ‘비난하여’(2절, ‘디아 크리노’Acts 11:2 diekri, nonto)라고 된 동사는 사도행전 10장 20절에 쓰인 ‘의심하다’(‘디아 크리노’)와 같은 동사이다. 베드로의 환상 가운데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의심하지(‘디아 크리노’) 말고 고넬료에게 가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이제 본문에서 할례자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한다(‘디아 크리노’).

 

<비난의 내용-3절>

할례자들이 한 비난의 내용이 3절에 언급된다. 즉 베드로가 무 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은 나오지만 함께 먹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48절에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머물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함께 식탁 교제를 했을 가능성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할례자들의 비난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면서 이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며, 이방인들은 우상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은 사건은 이방인들과 같이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고 생각.

 

4~17 베드로의 변론

4-10절 할례자들의 비난에 대해서 베드로는 자신이 욥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본 환상에 대해서 설명한다. 베드로의 환상 기사는 사도행전 10장 9-16절에서와는 달리 베드로의 관점, 즉 일인칭 ‘나’의 관점으로 설명이 되고 있으며 또한 좀 더 생생하게 묘사가 된다. 누가는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를 좀 더 생동감 있게 기록하기 하여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6절)라고 기록한다.

<4절-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는 이 환상을 ‘차례로’ 설명한다. 누가는 ‘차례로’라는 단어를 이미 누가복음 1장 3절(‘차례대로’)에서 사용했다. 이 ‘차례로’라는 말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설명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라는 의미이다.

베드로의 환상은 그가 본 것(5, 6, 10절)과 그가 들은 것(7, 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을 반복하면서 전번에는 세 종류의 짐승 즉,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행 10:12)에 대해서 말했지만, 이제는 네 종류의 짐승 즉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11:6)이라고 들짐승을 덧붙인다.

 

이러한 환상 가운데서 본 세 가지와 네 가지의 분류는 몇 가지 종류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짐승과 새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하고 있었다는 포괄성 쪽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훌륭한 작가로서의 누가의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서술에서 새로운 사실을 두 번째 반복할 때까지 남겨두었다가 다시 반복한다.

11~14절

베드로는 이어 고넬료의 환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베드로는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 이유가 성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12절- 이 여섯 형제>

베드로가 지적한 ‘이 여섯 형제’는 욥바에서 베드로를 동행했던 할례 받은 신자들(10:45)이다. 베드로는 이 할례 받은 신자들을 언급함으로써 베드로 혼자서 고넬료와 그 집에 일어난 이방인의 오순절 사건을 자기 혼자만 목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도 목격한 사건임을 밝힌다.

 

고넬료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10:33)라고 말했는데, 이제 베드로는 고넬료의 말을 다시 설명하면서 ‘너에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보이리라’(14절)고 말한다. 즉, 고넬료의 집 방문의 문제는 단순히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문제였음을 암시한다.

15~16절

<고넬료 집의 성령강림 사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베드로는 이제 고넬료와 그 집에 일어났던 성령강림 사건을 설명한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임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는 구절에서 ‘처음’은 사도행전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르친다. 따라서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라는 말을 통해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있던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강림사건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사건과 비슷한 사건이라고 밝힌다.

<16절>

그리고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예수의 말씀을 회상해낸다. 베드로가 회상한 예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5절(‘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에 기록되어 있다.

17~18절

베드로의 최후 호소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으니’(17절)라고 다시 한번 고넬료의 집에서 발생한 이방인들의 성령강림 사건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과 유사한 사건으로 관련짓는다.

 

17절의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는 베드로의 주장은 할례자들의 비난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절정을 이루는 구절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의 들어가 식탁 교제를 나누고 세례를 준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어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먼저 들이셨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18절

베드로의 말에 베드로와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아무 말로 하지 못한다. 이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더 이상 베드로를 비난하지 않고 베드로의 행동에 동의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말에 다 동의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도들과 온건한 그리스도인들만 베드로의 말에 동의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에 드러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의견 충돌(행 15장)과 바울에 대한 반대(행 15:1)는 베드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쯤에 생겨난 일들
-주의 동생 야고보가 이 시기쯤에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몇 가지 이유

1) 전도사역. 베드로의 잦은 전도사역으로 돌아다녔기에 영향력 약화.
2)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히브리 파 기독교인들로 구성

-이 시기 경에 야고보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근거:
유대적인 성경이 강하다. 이방 선교가 진행되던 중에 기록된 것 같다. 행함을 강조.
야고보서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것. AD. 1세기에 상황은 기근의 상황이었다. 행 11장 28-29절의 기근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생각 가능. 이 시기쯤 야고보서가 기록됐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 11:19~30

단락 구분

19-26 안디옥교회의 시작

27-30 예루살렘 형제들을 부조하는 안디옥교회

 

누가는 이방인에게 한 복음 선포와 이들의 개종이 단순히 한 사람 즉 베드로의 사역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개입한 사건임을 밝힌다. 누가는 특히나 예루살렘 교회의 안디옥으로의 바나바의 파송과 또한 안디옥교회의 예루살렘으로의 부조를 보내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6 안디옥교회의 시작

1. 환난이 배경(19절)

2. 교회를 세운 사람의 이름이 특별하다. 이름이 없는, 무명의 성도들이 세운 교회이다.

3. 이방인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베드로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11장이 보여준다.

   헬라파와 히브리 파가 이방인 선교에 하나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를 파송함으로 도와준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보내 돕는다.

 

19~21절

누가는 고넬료 가정의 회심 사건에 관한 기록 이후에 안디옥교회의 시작에 대해서 기록한다. 누가는 안디옥교회의 시작을 고넬료 가정의 회심 사건과 할례자들이 베드로에게 한 비난 직후에 있었던 사건 이후에 기록하여 마치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라는 기록을 덧붙여 안디옥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8장의 스데반 순교와 이후의 박해와 연관시킨다(8:1-4).

 

스데반 순교와 이후 박해로 성도들이 흩어져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가게 된다.

 

<베니게>

당시에 욥바는 베니게의 일부로 간주가 되었고, 또한 가이사랴는 베니게 지역으로 생각이 되고 있었다 (참고, 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 5:69; Josephus, Antiquities 15:333). 따라서 가이사랴에서 한 빌립의 전도(8:40)와 욥바에서의 베드로가 한 전도(9:43; 10:24)는 이미 이들을 통해 베니게 지역에 복음을 전파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구브로>
‘구브로’는 이미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의 고향으로 언급이 되었다(4:36).

 

<안디옥>
‘안디옥’은 시리아 지역의 수도였는데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위치해 있으면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세 번째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참고, Josephus, Jewish War 7:41-62).

 

환난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이 지역에 이르러 복음을 전한다. 누가는 이런 지명을 언급함을 통해 이 사람들이 베드로와 빌립보다 더 넓은 지역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한다. 20절은 이 사람들 중에 알려지지 않은 몇 사람이 안디옥에 와서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밝힌다. 이름이 없는 이 성도들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안디옥에 있던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사도행전에는 무명의 성도들의 선교사역을 기록한다. 8:1-4 “모든 땅으로 흩어지더라.
11:19-20 무명의 성도들이 안디옥 교회를 세움. 선교에 있어서 이름 없는 성도들이 굉장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성도들도 사용하셨다. 이름 없는 사역자들도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누가는 선교에 있어 무명의 성도들의 역할을 계속 강조해 오고 있다. 스데반 순교와 함께 일어난 박해 때도 무명의 성도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행 8:1-4). 그리고 안디옥교회의 시작도 박해 가운데 흩어졌던 무명의 성도들의 역할이 있었다 (행 11:19-20). 또한 스데반 순교와 박해의 영향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미쳤음을 누가는 보여준다.

 

<안디옥>에는 당시에 약 800,000명의 인구가 있었고 따라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그 시대에 큰 도시였다.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 중에 유대인들의 인구는 24,000명(2만 4천 명- 강한 소수 strong minority)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참고, Josephus, Antiquities 12.119-124).

 

여기 헬라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회당에 드나들던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안디옥에는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섞여 살았다. 또한 회당에서도 유대인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즉 회당에 참석하지만 할례를 통해 유대교로 개종하기는 꺼려했던 이방인들이 존재했다.

 

<20절- 주 예수를 전파하니>
몇몇 성도들이 헬라인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주 예수’를 전파했다(20절). 주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은 예수가 주되신다는 것을 전파했다는 의미이다. 헬라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보다는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메시지가 더 적실성 있게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성도들은 유대교의 메시아로서 예수에 대해 선포하기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예수께서 주님 되심을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21절-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의 손이 함께 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사용되는 표현으로(출 9:3; 삼상 5:3,6,9, 사 59:1; 66:19 겔 1:3등),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역사하면서 복음 전파자들의 증거를 뒷받침했음을 의미한다. 주의 손이 복음 전하는 자들과 함께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된다.


이름 없는 성도들을 통해서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남.

22~24절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이 복음을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리더/장로 가운데 한 사람?)를 안디옥으로 파송한다.

 

<안디옥/바나바 파송 // 사마리아/베드로와 요한 파송>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사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 같이, 이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낸다.

 

<차이점>
물론, 사마리아 성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과 안디옥에 있던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기록한 내용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1) 사마리아 성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는 사도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행 8:14). 하지만 안디옥교회의 경우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는다.

(2) 또한 사마리아 성의 경우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대표자들로 파송했지만, 안디옥 교회의 경우에는 사도가 아닌 바나바를 대표자로 파송한다.

 

<공통점>
그러나 이 두 사건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사항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지역들의 복음 전파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헬라파와 히브리 파가 복음전도에 함께 했다.

 

23절은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보인 반응(23상)과 그의 권면(23하)을 다루고 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한다’. 바나바는 이미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위로/권면의 아들’이라고 소개되었다. 그의 별명답게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하는 일을 감당한다. 구브로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성도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같은 지역 즉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가 안디옥에 파송된다(행 4:36).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23)”:
초대교회의 설교 내용. 예수님을 믿고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전했다. 성도의 인내를 강조한다. 견뎌냄, 참아냄. 한번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한국교회의 구원 파적 가르침은 문제가 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주제가 흐른다.

  1. 확신: 롬 5:9-10, 롬 8,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 경고: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예수 믿는 사람들 대상.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사람은 확신만을 강조한다. 경고를 무시한다. 나머지는 상급의 문제로 치부한다.
알미니안 경향의 사람은 제대로 살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가장 좋은 것은 두 가지를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24절

바나바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회심하는 일이 벌어진다. 더하여지더라- 신적 수동형. 하나님이 사람들을 더하심.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었다. 바나바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사도행전 다른 구절들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설명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표현은 몇 구절들에서 사용된다(눅 4:1-예수, 행 7:55- 스데반, 행 6:5-일곱 일꾼). 사도행전에서는 이 구절을 제외하고 어디에서도 착하다는 형용사가 사람을 수식하지 않는다. 즉 어느 누구도 착하다(good)고 불리지 않는다.(사도행전에서 형용사인 good이 사용되는 경우- 행 9:36-도르가의 착한 일(=선행), 행 23:1- 바울의 선한 양심; <참고> 눅 23:50- 아리마대 요셉: 선하고 의로운 요셉).. 사도행전에서 바나바한테만 선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고(행 4:36-37), 사울을 도왔고(행 9:27), 지금은 안디옥교회의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런 것이 이 사람이 평판을 받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더하여지더라- 수동태이다. 의미상의 주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이신 것이다.

 

*참고: 행 6:3- 일곱 일꾼의 자격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칭찬받는(marturoume, nouj): 다른 사람들이 증언해 주는 사람= 평판이 좋은. 같은 동사의 사용 구절: 행 10:22-고넬료; 16:2-디모데; 22:12-아나니아, 딤전 5:10-명부에 올릴 과부의 자격.

25~26절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을 다루는 구절이다. 바나바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성장이 안디옥교회에 찾아오고(참고, 26절- 큰 무리), 이 교회를 바나바 혼자서 사역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누가는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안디옥교회에 데리고 와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모습을 설명한다.

 

<사울>은 사도행전 9장 30절 이후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아 살해의 위기에 놓인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이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낸다. 사울은 이 곳 다소에서 바나바가 자기를 찾아올 때까지 머문다. 이 시기에 시리아와 다소에서 복음을 계속 전하고 있다(갈 1:21 이하)


시리아-안디옥, 다소-길리기아에서 복음 전하고 있던 사울을 바나바가 데려옴.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사울의 후원자 역할을 한다. 한 번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사울과 교제하기를 꺼려했을 때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가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왔다(행 9:26-27). 그리고 현재 본문에서도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 안디옥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함께 할 동역자로 세운다.

<26~30절> (안디옥교회 // 예루살렘 교회)


본 단락에 언급된 안디옥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앞부분에 설명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1). 두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부흥을 경험함.
예루살렘 교회: 행 2:41, 47, 행 5:14
안디옥교회: 행 11:24


(2). 두 교회 다 가르침을 받는 교회이다.
예루살렘 교회: 가르침, 교제, 떡 뗌, 기도에 힘씀. 행 2:42
안디옥교회: 11:26절 1년간 가르쳤다.


(3). 두 교회 다 구제하는 교회였다.
예루살렘교회: 물건을 통용
안디옥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냄.

그리스도인이라...(11:26)


crhmati, sai te prw, twj evn VAntiocei, a| tou.j maqhta.j Cristianou, jÅ >
안디옥에서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이곳에서 사용되고 또한 사도행전 26장 28절에서 아그립바 왕이 기독교인 공동체를 향해서 비웃는 투로 사용한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Cristianou, j
그리스도인이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의 사람들, 교회 외부 사람들이 부른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명예로운 호칭이 아니고 수치스러운 호칭이었다. 아그립바 왕이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비웃는 말로 사용됨. 벧전 1: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늘날로 하면 개독교인이란 말이다. 1세기경에는 부끄러운 말이었고, 2세기 이그나티우스에 이르러서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 3번 등장하는데 다른 두 번은 확실히 부끄러운 호칭임으로 안디옥 교회에서도 칭찬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결론: 별종이네라는 의미, 이방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도 다르게 살아가자.

 

그리스도인(Christian=Christ-people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언급하기 위해 교회 외부의 사람들 특히 헬라인들이 냉소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방 기독교인들이 지배적이던 안디옥의 상황 즉 그 당시 안디옥에 거주하던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향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비아냥거리는 호칭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다. 경멸적인 용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모두 3번 사용되는데(행 11:26; 26:28; 벧전 4:16)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 호칭은 AD 2세기 안디옥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이르러서야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게 된다.

 

27-30 예루살렘 형제들을 부조하는 안디옥교회

27절- <선지자들>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른 <선지자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누가는 선지자라는 용어를 세례 요한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 ‘선지자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은사를 지닌 신자들을 가리킨다(행 11:27; 13:1; 21:10).

 

28절- 아가보

<아가보>는 사도행전에 두 번 언급되는데 두 경우 모두 예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행 11:27; 21:10-14). 아가보가 예언한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통치 시기(AD41-54)에 로마제국에 있었던 곡물이 부족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왜 가난했을까? 핍박 때문에 흩어져서 더 가난해졌을 것이다.
부조의 방법은 “각각 그 힘대로”하였다. 없는 사람은 조금만, 있는 사람은 많이.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를 파송함으로 도와준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보내 돕는다.
안디옥의 제자들이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부조를 모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낸다. ‘장로들’은 누가의 저작(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이전까지 누가는 장로라는 단어를 유대인들의 지도자를 언급하는 말로 사용했다(행 4:5,8,23).

 

1. 하나님은 이름 없는 성도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명예욕에 빠지지 말라.

2.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 영적, 착하다=> 인격. 성령과 믿음은 충만하면서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가? 영적인 부분과 인격적인 부분이 조화가 되고 있는가? 목사이기 전에, 장로이기 전에 착한 사람인가를 확인해보라. 목회자는 직분이고 정체성은 성도이다. 성도로서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는가?

3.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해 간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의 영역을 구축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경쟁심에 빠지기도 한다.

4.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안디옥 교회의 모습인가? 하나님이 주신 부흥하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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