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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2장

by 소북소북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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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2장

교회 외부로부터의 핍박=> 하나님의 개입으로 역전시키신다.

사도행전 12:1-12

단락 구분

1-5상 헤롯의 핍박

5하–12 구출되는 베드로

 

야고보의 순교 이야기는 베드로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더해 준다. 베드로는 목 베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다. 철통 같은 군인들의 감시는 베드로가 죽음을 이미 경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베드로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출되듯이 상징적인 죽음에서 구조된다.

1-5상 헤롯의 핍박

1~2절

누가는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요한 인물이지만, 베드로의 수감과 그의 구출에 비해서 야고보에 대한 설명은 아주 간략하다. 이것은 베드로가 처한 상황 또한 야고보와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로 보인다.. 베드로도 야고보처럼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의 순교 이야기를 짧게 기록하였다.

 

‘그때에’라는 구절은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수감한 시기가 바로 앞 11장 27~30절까지 언급된 안디옥교회의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부조를 보내는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임을 암시한다. 누가는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보내는 부조에 대한 언급을 12장의 바로 이전 부분(11:30)과 맨 마지막 부분(12:25)에 함으로써 헤롯왕의 교회 핍박 사건을 안디옥교회가 부조하는 시기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은 사람을 누가는 ‘헤롯 왕’이라 밝힌다. 여기에 언급된 헤롯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틀어 세 번째 등장하는 헤롯이다. 예수 탄생 시의 헤롯 대왕(눅1:5) 그리고 예수의 사역기간과 그의 죽을 때까지 통치했던 분봉왕 헤롯(눅 3:1;8:3; 23:7-15)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헤롯이다. 이 ‘헤롯 왕’은 역사상 아그립바 1세로 누가복음 1장 5절에 언급된 헤롯, 즉 헤롯 대왕의 손자이고, 나중에 사도행전 25:13~26:32에 언급되는 아그립바, 즉 아그립바 2세의 아버지이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며 예수의 젖동생인 야고보와 순교당한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요한의 형제’라는 말을 붙여놓았다. 이 야고보는 예수께서 부르셨던 첫 번째 제자들 그룹 중 하나이고(눅 5:10),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어 예수와 좀 더 특별한 친밀 관계를 유지하던 제자였다(눅 8:51; 9:28,54).

 

야고보는 칼로 죽는데, 이것은 그가 목베임을 당해 죽었다는 말이다. 당시에 목베임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여겨졌다(m. Sanh. 7:2). 이 목베임은 ‘살인자’와 ‘배교한 도시의 거주자들’이 받는 처형방법이었다(m.Sanh. 9:1). ‘배교한 도시의 거주자’라는 말은 신명기 13:15에 근거한 말인데,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야고보는 우상숭배자와 배교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자로 간주했고 이에 걸맞게 야고보는 이런 죄명으로 목베임 당해 순교한다.

3~5절

헤롯왕은 유대인들이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베드로도 잡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운다. 베드로가 잡힌 것은 무교절 기간이었다는 것은 야고보와 달리 베드로가 바로 처형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한다. 헤롯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무교절 기간 사람들의 소요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월절 기간에 잡혀 사형당하셨듯이 베드로 또한 같은 기간에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눅 22:1,7). 예수의 수난과 베드로의 수감은 많은 유사점이 있다. 예수의 수난이 무교절 기간이었듯이, 베드로의 수감도 무교절기간이다.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사용되었던 ‘잡다’는 동사가 여기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쓰이고 있다(참고, 눅 22:54; 행 12:3). 또한 빌라도가 예수를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보여주었듯이, 헤롯왕도 베드로를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했다(눅 23:13; 행 12:4).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듯이, 베드로 또한 군인들에게 넘겨진다(눅 24:7, 20; 행 12:4).

 

베드로는 옥에 갇히는데 군인 16명이 맡아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왜? 5:19에서 탈옥한 적이 있기에 많은 사람을 배치했다. 로마인들의 수감자에 대한 감시는 한조가 4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밤사이에 4개 조가 3시간씩 수감자를 감시하는 체계였다. 두 명은 수감자의 양쪽에서 각각 쇠사슬에 자신과 수감자를 함께 묶어서 감시를 했고(6절), 나머지 두 명은 감옥 문밖에서 감시를 했다(참고 6절).

누가가 베드로의 수감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베드로는 감옥의 벽과 감시하는 군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교회가 하는 기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5절)

5하–12 구출되는 베드로

6~10절

누가는 베드로가 어떻게 철통 같은 감옥과 군인들의 감시에서 구출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두 군인 틈에 매여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의 천사가 홀연히 나타난다. 헬라어 원문에는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라는 구절 앞에 ‘보라!’는 단어가 쓰여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여기 ‘나타나다’는 동사는 ‘홀연히’라는 말과 함께 쓰여 갑작스럽고 놀라운 등장을 묘사한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운다. 천사의 동작을 나타낸 ‘치다’는 헬라어 동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원수들을 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2:12; 삿 1:5 등). 또한 같은 사도행전 12장에서 이 동사는 주의 사자가 헤롯을 친다는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천사가 베드로를 쳐서 깨운다는 표현은 아주 생생하면서 강력한 표현으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억지로 깨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깊이 자고 있었을까? 베드로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편하게 자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다. 베드로의 상황은 자포자기의 상황이다. 베드로는 과거에 이미 두 번이나 구출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6일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내일이면 죽는다. 그렇기에 현재 베드로는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것 같다. 문맥을 보면 파수꾼 16명을 죽인다. 당시 파수꾼은 죄수가 도망치면 죄수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즉 베드로도 죽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의 개입은 마감시간 1분 전이다.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일하시고 건져내신다.
베드로의 기적적인 구출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유사하다. ‘급히’ 일어나(12:7; 출 12:11), 신을 신고(12:8; 출 12:11)라는 표현들은 출애굽 전날 밤 유월절을 지키던 때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베드로의 기적적인 구출 이야기는 초자연적 능력의 개입과 이와 반대되는 베드로의 수동성의 대조를 보여준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를 따르고 있고, 그는 이 과정에서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지 환상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베드로의 탈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출사건이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그가 욥바에서 큰 보자기 환상을 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지만, 환상에서 자기에게 준 지시를 따르는데 머뭇거려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말에 저항했다.

 

그러나. 본 단락에서도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지시를 받는 대로 따라 행동한다.
베드로의 수동성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의 개입이 대조된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탈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출사건이다.
“저절로 열리는 문” 베드로가 열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여신 것이다.

11~12절

누가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출된 이후 보인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천사가 떠나자 베드로는 정신이 든다(참고, 비슷한 현상 눅15:17).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환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방금 경험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행 10:17).

 

‘유대 백성들의 기대’는 베드로를 요한의 형제 야고보처럼 목 베어 죽이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후 그가 찾은 곳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는데, 여기서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라는 이름은 당시 가장 흔한 라틴식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요한이라는 유대식 이름에 덧붙여졌다. 마가 요한의 이름이 여기서 언급된 이유는 그가 사도행전 12장 25절에서 다시 언급되기 때문으로 미리 그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다.


사울(유대식), 바울(로마식)
교회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하심.


“기도하는 교회”

누가는 기도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구출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교회의 기도였으며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음을 암시한다. 누가는 교회를 기도하는 공동체라고 지속적으로 묘사한다(1:14, 24; 2:42; 3:1; 4:23-30; 6:6; 8:15; 9:11,40-41; 10:4,9; 13:3; 16:25; 20:36, 21:5; 22:17; 28:8).

사도행전 12:13~25

단락 구분

13-19 베드로의 석방에 대한 반응들

20-23 헤롯의 죽음

24-25 복음의 확산

 

누가는 교회가 헤롯왕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난폭한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지 못하자 대신 군인들을 처형한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묘사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베드로에게 계획했던 죽음을 자신이 떠맡는다. 교회의 박해자 헤롯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방해받지 않고 흥왕 해 감을 누가는 이 단락에서 보여준다.

13-19 베드로의 석방에 대한 반응들

13~15절

누가는 초자연적 개입으로 철통 같은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를 보고 교회가 보인 행동을 묘사한다.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베드로의 기적적인 구출을 믿지 못한다. 베드로는 마리아의 집에 도착해 대문을 두드린다.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의 문은 저절로 열렸었다(행 12:10).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또 다른 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이 문을 쉽게 열리지 않는다.


베드로의 탈출 사건은 교회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두 개의 문, 감옥문은 잘 열렸는데, 집의 문은 안 열렸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문소리를 듣고 베드로를 영접하러 나온다. 이 여자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이 여자 아이는 여종을 의미하며 문지기였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음성을 듣고 이 로데는 이 사람이 베드로임을 알아차린다. 베드로는 갈릴리 억양이 있었기 때문에 여종이 쉽게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참고 마 26:73). 누가가 사용한 여종(‘여자 아이’)라는 용어는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하던 날 밤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때도 여종은 베드로가 누군지 그의 하는 말의 억양을 통해 알아차렸다. 베드로의 정체를 알아본 로데는 대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보고한다.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 있었다는 구절(10:13,14)은 마리아의 집이 뜰이 있는 집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참고 행 10:17).

 

누가는 계속해서 마리아의 집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다. 그들은 여종을 보고서 ‘네가 미쳤다’라고 야단을 친다. 이 장면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말에 열한 사도들이 보여준 반응과 너무나 유사하다(눅 24:11). 여기서 ‘미쳤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26:24~25에서 누가가 한번 더 사용하는데 ‘비이성적이다’라는 의미이다.

 

성도들은 대신에 여종에게 ‘베드로의 천사’를 본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천사를 보았다는 말은 베드로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부활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눅 24:37). 이들은 베드로의 생환을 꿈도 꾸지 못했다.

 

 

 

16~17절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생환을 믿지 못했지만, 결국 대문을 열어보고서야 베드로의 기적적인 생환에 놀란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환상과 기적을 다시 반복해서 설명한다. 베드로의 초자연적 생환은 주의 천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에서 주의 천사라고 말하지 않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했다’고 밝힌다.

 

베드로는 자신의 석방을 둘러싼 이야기를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말한다. 누가는 여기에서 ‘야고보’가 누구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야고보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을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야고보는 주의 형제(막 6:3; 마 13:55; 행 1:14)로 바울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갈 1:19; 2:9).

 

야고보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1장 18절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미 17절에서도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고보와 함께 언급된 ‘형제들’은 지금 마리아의 집에 지금 있지 않지만 예수를 믿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 말을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 이 ‘다른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여타 신약성경의 언급을 재구성해 보면 안디옥(갈 2:14), 혹은 고린도(고전 1:10; 9:5)로 추정할 수 도 있고,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로마(벧전 5:13, 1 Clement 5:4; Acts of Peter 7)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지 ‘다른 곳’이라고만 언급할 뿐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헤롯왕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지역으로 갔을 것이며, 적어도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전에 예루살렘에 되돌아왔을 것이다. 

18~19절

누가는 이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구출된 후 헤롯과 그의 군인들이 보인 반응을 기록한다. 18절은 베드로를 지키던 군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들은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보고 ‘적지 않게’ 소동한다. 19절은 헤롯왕의 반응을 부각한다. 그는 군인들을 심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한다.

 

감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자기가 지키던 죄수가 감옥에서 도망가면 그가 받아야 했던 형벌을 대신 받았다. 이런 관습은 빌립보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가두었던 옥문이 열린 것을 안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행 16:27). 베드로의 처형을 대신해서 감옥을 지키던 군인들이 처형당한다.

헤롯은 간수들이 돈에 매수되어 베드로를 풀어준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베드로가 지금 평안히 잤는가? 자포자기 상태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는 상태였다. 모든 희망을 내려놓고 포기하던,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 구출하신다.

20-23 헤롯의 죽음

20~23절

누가는 헤롯의 난폭한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헤롯왕은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목메어 죽였다. 베드로도 죽이려고 했지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구출되고 나자 감옥을 지키고 있던 군인 16명을 대신 처형한다. 이제 20절에 이르면 헤롯의 폭군적인 모습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분을 품고 있던 그가 이들에게 양식 공급을 중단하는 일로 묘사된다. 아마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왕의 영토인 갈릴리에서 나던 밀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이 일을 해결하려고 블라스 도라는 신하를 중재자로 내세워 헤롯과 화목을 꾀한다. 블라스도는 사도행전에서 여기에 단 한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의 임무는 ‘왕의 침소를 맡은 자’(20절)로 되어 있는데 왕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위의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왕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자 이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21절의 배경은 이 축하 행사였다. 헤롯이 왕복을 입고 단상에 오른다. 헤롯은 이때 은색 의복을 입었는데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보였을 것이다(참고, 요세푸스 Antiquities 19:344-345). 그는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는데 이것을 보고 백성들이 헤롯의 연설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쉬지 않고 말을 한다. 그러나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한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는다. 여기서 ‘치다'는 동사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베드로에게 한 행동을 묘사할 때도 쓰였고, 또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원수들을 치시는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참고, 출 2:12; 삿 1:5등). 헤롯은 자신이 베드로에게 행하려고 했던 처벌을 자신이 받게 된다.

 

헤롯은 바로 죽지 않고 5일 정도 지속되다가 죽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한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추측컨대 맹장염이 복막염이 되어 죽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참고, Marshall, Acts, 213쪽). A.D. 44년에 헤롯이 죽는다. 부조보다 2년 전, A.D.46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이렇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24-25 복음의 확산

요약 진술문: 복음의 확장.
6장:7, 교회의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일곱 일꾼을 세워 지혜롭게 대처함으로. 사람들이 지혜롭게 해결함으로.
9장:31, 스데반의 순교, 사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확산됨.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전으로.
12장. 헤롯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확산됨.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헤롯을 심판하심으로

25절

교회를 박해하던 해롯이 죽자 하나님의 말씀은 더 힘을 얻어 교회가 성장해 간다. 이 요약문은 누가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던 형식의 요약문이다(2:47; 4:4; 6:7; 9:31; 12:24). 교회의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고,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던 폭군 헤롯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성장해 간다. 25절의 바나바와 사울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1127~30절에서 시작되었던 안디옥교회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조가 실천에 옮겨져 그 임무가 다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헤롯의 죽음과 부조 사건이 맞물려있다.
헤롯의 죽음 44년, 부조사건 46년.
부조는 헤롯이 죽은 2년 후이다.

 

12장 두 개의 대조 단락이 등장한다.

 

1. 하나 된 교회: 구제헌금 사건, 교회의 하나 됨과 교제.

2. 핍박받는 교회: 헤롯 왕으로부터 순교 및 핍박 받음.

 

적용

1. 하나님의 구출사건. 베드로가 구출된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드로를 구출하신다. 그런데 그 때 교회가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의 기도로 누군가가 살아난다.

2. 야고보(1-2)는 죽는다. 베드로처럼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사람도 있지만 믿음으로 죽는 사람도 있다.

   믿음으로 구출되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죽기도 한다.(히)

3. ‘그 전날 밤에’, 왜 하필 마감시간 1분 전인가?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은 마감시간 1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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