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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 18장 고린도에서의 전도

by 소북소북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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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장 고린도에서의 전도

 

행 18:1-17에서 누가는 4개의 사건들을 소개하면서 유대인들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어떻게 고린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효과적으로 사역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 1-4절 회당에서의 사역,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의 동역
(2) 5-8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반대에 부딪힘(6절-비방하거늘).
(3) 9-11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복음에 대해 반응. 주님의 환상을 통해 격려받는 바울(10절-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 환상을 계기로 바울은 1년 6개월을 고린도에서 머물러 사역하게 됨.
(4) 12-17절: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에 공개적으로 고소함. (13절 -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2), (4) 번이 바울의 복음에 대한 반대를 언급함. 이러한 반대 상황에서 어떻게 18개월을 고린도에서 머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 9절. 주께서 환상 가운데 격려하셨기 때문에 고린도에서 사역할 수 있었다.

 

1) 고린도에서의 전도는 이전의 전도와 차별된 시간적, 공간적 특징이 있다.


(1) 공간적 (7절). 회당을 떠나서 회당 옆에서 복음을 전했다.
(2) 시간적 (11절).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함.
→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유대인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튼실하게 맺었음을 보여준다.

 

2) 또 하나의 특징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사이에 너무나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생업 등장(천막 만드는 이야기).

단락 구분

1-11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

12-17 총독 갈리오 앞에 서는 바울

18-22 안디옥교회로 돌아가는 바울

23-28 아볼로의 사역

1-11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

1절

고린도는 BC 27년에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12절에 의하면 ‘총독’이 머물고 있는 도시다. 항구도시였던 고린도는 성적타락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아폴로 신전, 이시스(Isis) 신전 그리고 아프로디테(사랑의 신, 비너스) 신전등이 이 도시에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 .히브리인들의 회당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소개된다. 이들은 항상 둘이 같이 언급된다(행 18:18,26). 바울의 사역에 지대한 도움을 주는 부부이다. 이들은 신약성경에 행 18, 고전 16:19, 롬 16:3, 딤후 4:19에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AD 49년에 칙령을 내려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을 때 고린도로 온 사람들이다(참고, Suetonius Life of Claudius 25:4).. 바울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바울이 복음 전했다는 말이 없다. 아볼로도 마찬가지이다(18:24~).


로마에 언제 교회가 세워졌을까?

1)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
2) 예수님 시대에 백부장이 복무를 마치고 로마에 돌아가서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

3절

헬라 세계에서는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서로 상업 조합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 기록된 바울과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의 연합도 이런 관습의 실례로 볼 수 있다. ‘천막 만드는 일’은 문자자적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tent-making) 의미하지만 좀 더 넓게는 가죽을 다루는 여러 종류의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한편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하고, 동시에 복음 전하는 일을 했다(4절).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한 곳은 세 군데이다. 고린도(1년 6개월, 행 18:3), 데살로니가(세 안식일, 살전 2:9,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에베소(3년, 행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특징: 장기적으로 머물러 있던 곳에서.


주 중에는 일하고 안식일에는 복음 전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안에 약한 모습이 있었다. 무엇을 염두에 두는 것일까? 행 18장과 연관할 때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서 시장통에서 일하고, 안식일에는 복음을 전한일. 주중에는 택시기사 하고 주일에는 사역하는 것을 연상시킴.

4절

바울은 자신이 해 오던 방식을 따라, 유대인 회당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회당에 찾아가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강론한다’(diele, geto). 강론하다는 이 단어는 이미 행 17:2,17에 사용되었는데 ‘학문적 논쟁’을 의미한다. 그는 학문적 논쟁을 통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권면한다’(e;peiqe, n). 여기 ‘권면한다’는 동사는 설득한다는 의미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학문적 논쟁을 통해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또한 이방인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실라와 디모데는 행 17:15,16에 의하면 아직 마케도니아 지방(‘베뢰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이 두 사람이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온 후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sunei, ceto tw/| lo, gw|) 된다. ‘붙잡히다’(sunei, ceto)는 동사는 (1)‘붙들리다’, ‘체포되어 감금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2) ‘집중하다’ ‘몰입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로부터 받아온 재정후원이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더 효과적으로 복음 전파에만 일을 집중하도록 도와준 것으로 볼 수 있다(참고, 3절; 고후 11:9, 빌 4:15).


고후 11:9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받아온 재정 후원
빌 4:15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마케도니아 지역의 빌립보 교회(루디아)에서 재정 후원을 받아왔다.

6절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거부하는 반응을 보인다.
복음을 잘 전할 수 있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거부한다. 우리의 생각은 말씀에 잡혀서 복음을 전하면 부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음의 확산만큼 대적하는 힘이 큰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을때 오히려 조직적인 반대가 나타났다.


*적용: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여 비방한다. 여기 대적한다는 동사는 사도행전에서 여기만 사용되는 단어로 ‘조직적인 반대’(organized opposition)를 의미한다(참고 Herodotus, Hist. 4.134).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라는 심판을 선언한다. 이 표현은 삼하 1:16과 왕상 2:33; 3:1등에 나오는 구약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는 바울이 2번째로 선언하는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참고, 13:46). 하지만, 이후로도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18:19; 19:8). 그러나 이 선언은 바울의 고린도 사역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게 될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7-8절

이 구절에는 고린도에서 회심한 두 사람인 디도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의 이름이 언급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라는 로마 시민의 이름으로 소개되어 이방인임을 보여주고, 다른 한 사람인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 유대인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각각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7절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나 바울은 새로운 복음 전파의 거점으로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을 사용한다. 회당을 떠나 새로운 복음 전파의 거점을 찾는 일은 이후로도 바울 사역의 패턴이 된다(참고, 행 19:9). 바울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거점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집에 두는 일은 여기 고린도에서 뿐만 아니라 루스드라에서도 했던 일이다(행 16:15).

8절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집안의 회심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가족회심의 또 하나의 예이다(참고, 행 10:2, 11:14, 16:15,31). 그리스보는 회당장인데, 고린도의 회당은 여러 명의 회당장이 공동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행 18:17- 회당장 소스데네). 그리스보는 고전 1:14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례를 준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된다.

9-10절 예수님의 천상 사역

바울이 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환상에서 말씀하시는 주체는 ‘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1인칭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사도행전에는 주의 사자 혹은 성령이 환상가운데 언급되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한다(행 9:5; 18:9-10).

 

이렇게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사도행전의 본문들은 사도행전 주님이 천상에서 그 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는 내용임을 보여준다. 주님이 바울과 함께 하셔서 어떤 해도 받지 않게 해 주신다는 약속과 확신의 말씀은 행 18:12-17에서 실제로 성취된다.

11절

바울은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며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조직적인 반대(6절)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오랫동안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9-10절에 기록된 주 예수께서 환상 가운데 주셨던 확신 때문이었다.

12-17 총독 갈리오 앞에 서게 되는 바울

12절

갈리오는 AD 51년에 아가야의 총독으로 있었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여기 언급된 갈리오는 웅변가 세네카(BC 50-AD 40)의 아들이고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BC4-AD65)의 형이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에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바울에 유대인들의 대적은 법정(bema) 고소로 이어진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사회, 정치적 내용이었던 행 16:20-21과 행 17:7과든 달리 고린도에서는 종교적인 내용으로 온건한 편이다.

13절: 종교적인 내용으로 고소함.

14-15절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의 고소를 듣고 ‘부정한 일’이거나 ‘불량한 행동’이면 고소를 받아 재판을 하겠다고 말한다. 부정한 일은 치밀하게 계획된 잘못된 행동을 의미하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량한 행동’은 즉흥적이고 생각이 없는 잘못된 행동을 의미한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언어와 명칭, 너희 법에 관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특정한 내용을 의미하기보다는 행동과 관계없고 단지 입에서 나오는 말과 관련된 것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행동이 아닌 말과 관련된 일에 재판으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갈리오의 판단이다. 더 나아가 언어와 명칭이라는 문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구체적인 이름과 명칭과 관련된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관련된 문제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갈리오의 판결을 통해 우리는 그가 아직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대교는 religio licita(합법적 종교)로 인정되어 로마제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갈리오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합법적인 종교는 보호해주었다. 유대교는 당시 합법적 종교였다. 갈리오는 기독교도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했다.

갈리오의 판결은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로마 총독이 바라볼 때 기독교는 로마 정부에 위협적인 종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변증적 목적이 있다.
(2) 문맥상 바울이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9-10절의 주님의 환상에 대한 성취이다.

 

 

16-17절

그들: 유대인들과 바울의 일행
갈리오 총독의 판결 후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쫓아냈다’(16절 avph, lasen)는 동사는 가끔 물리적인 추방을 의미하기도 한다(겔 34:12 LXX). 따라서 고소한 유대인들이 강제적으로 법정에서 쫓겨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법정(bema)에서 쫓겨난 이후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린다. 소스데네는 회당장이라고 소개되고 있고, 고전 1:1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발신인으로 바울과 함께 소스데네가 언급된다는 점은 이 사람이 이 사건이 벌어질 당시 기독교인이거나 후에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소스데네는 행 18장의 법정 고소가 있었을 당시에 바울이 전한 복음과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소스데네를 때린 사람은 ‘모든 사람’이다. 정확히 이들이 유대인들인지 헬라인들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헬라인이라고 볼 경우 고린도에서 있었던 헬라인들이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대적하는 유대인들로 볼 경우, 기독교에 호의적이던 소스데네를 때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갈리오는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진 총독이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반유대주의적 동기로 소스데네를 때리는데 무관심했을 것이다(Bock, Acts, p 580).


갈리오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무관심했다. 하나님께서는 무관심을 통해 바울의 사역을 돕게 되었다.

18-22절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바울

이 단락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교회로 돌아가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2차 전도여행의 마무리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 단락에서 우리는 두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1)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은 일(18절) (2) 바울이 안디옥 교회로 바로 귀환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일(22절).

18절

바울은 수리아로 가기 위해 고린도의 동쪽 항구였던 겐그리아로 간다. 그리고 수리아로 항해하기 전에 거기서 머리를 깎는다.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약 11Km 떨어진 지역으로 에게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롬 16:1에는 이 겐그리아 출신의 ‘뵈뵈’가 기록되어 있어 겐그리아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은 이유는 ‘서원’(vow) 때문이었다. 이 서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민 6:1-21. .바울의 서원은 나실인의 서원이었을 것이다.
(2) 10절 .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하는 서원.


(3) 당시 이방세계의 항해사들의 풍습을 따르고 있다는 견해

당시 항해사가 힘든 여행에서 무사히 귀환한 후 수염을 깎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을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4) 누가의 창작으로 보는 견해.

유대인들이 서원을 하는 두 가지 경우

1) 과거: 하나님께 감사할 때, 2차 전도여행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2) 미래: 앞으로의 여행을 보호하여 달라는 간구의 차원.


유대인들은 보통 2가지 경우에 서원을 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과거에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할 때 서원을 했다. 이렇게 볼 경우, 고린도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안전하게 지켜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서원을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은 앞으로 미래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간구의 차원에서 서원을 했다.

 

이 경우 바울은 앞으로 자신의 여행에서의 안전을 위해 서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짧은 기간에 자원해서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경우 이 나실인의 서원은 행 18:18에서 시작이 되고 예루살렘에 도착해 수염을 깎는 일을 통해 끝났을 것이다(행 18:22 참고 행 21:23-26; 민 6:1-21).

 

바울의 서원과 수염을 깎은 사건에서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경건한 유대인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 당시 유대인들이 했던 서원을 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신실한 유대인이었음을 누가는 계속 제시한다. 바울은 유대교를 반대하거나 대적하는 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줌.

19-22

바울은 안디옥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배타고 와서 소아시아 지방의 수도인 에베소(19절)를 방문하고, 이후 배를 타고 다시 가이사랴에 도착한다. 그리고 난 후 그가 한 행동은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의미한다.

 

“올라가”(22) 그리고 “내려가서”(22)라는 동사는 예루살렘과 관련해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올라가다- 눅 2:4,42; 18:31; 19:28; 행 11:2; 15:2. 내려가다- 눅 2:51; 8:15,26; 24:1; 25:6).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와 유대감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행 9:26; 11:30; 12:25; 15:2, 25-26). 이후 바울의 이방인 선교 중심지인 안디옥 교회에 바울이 머문다.


예루살렘 교회와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줌.

23-28 아볼로의 사역

23절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3차 전도여행의 시작 동기: 목회적 돌봄.

1차 전도여행 동기: 14:21-22 
2차 전도여행 동기: 15:36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목적.
3차 전도여행 동기: 18:23 목회적 돌봄과 점검.
적용: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가? 새로운 영혼 전도와 함께 있는 영혼들을 굳건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23절

이 구절에서 부터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기록되고 있다. 안디옥에서 시작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마무리가 된다(행 21:17). 바울의 3차 전도 여행도 그 전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미 세운 교회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일을 위해 실시된다(14:21-22;15:41).

24-25절

바울의 동역자 아볼로가 처음으로 소개되는 본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70인 역 번역, 교육의 3대 도시 중 하나(알렉산드리아, 다소, 아테네)
그의 출신지와 인종 그리고 교육수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출신지는 알렉산드리아, 인종적으로는 유대인 그리고 교육 수준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소개된다.

 

“언변이 좋고”(lo,gioj)라는 어구는 (1) ‘학식이 있다’ ‘배운 것이 많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2) ‘말을 잘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아볼로는 ‘학식과 언변’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볼로는 ‘일찍이 주의 도를 배운’ 상태이다. 사도행전에서 ‘도’(the way)는 복음을 가리키는 단어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참고 행 9:12; 16:17; 18:25,26; 19:9,23; 22;4; 24:14,22). 따라서 아볼로는 이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임을 보여준다.

 

아볼로의 또 다른 특징은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 ‘열심히’(Acts 18:25 ze, wn tw/| pneu, mati)라는 어구는 (1) 심령에 불이 붙어서 혹은 (2) 성령에 의해서 불이 붙어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다(25절). 누가는 세례요한을 항상 주님을 위해 준비하는 자라고 설명하기 때문에(눅 3:16; 행 1:5; 11:6),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아볼로는 더 정확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수준의 사람임을 보여준다. 결국 아볼로 설교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것도 아니었다.

26절

지금까지 아볼로의 상태를 특징짓는 두가지는 (1) 열심히(25절) (2) 담대히(26절)이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열심과 담대함은 무모한 것이다. 그래서 아볼로는 더 정확하게 배워야 했다. 그래서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완전하고 분명한 복음의 내용을 가르친다. 브

 

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으로 아볼로는 구원이 가져다 주는 더 풍성한 혜택, 특별히 ‘성령’과 관련된 풍성한 혜택을 그 전보다 더 잘 알게 된다(참고 19:1-6, 특히 2-3절).


아볼로가 몰랐던 것: 성령님에 관한 것, 구원이 가져다 주는 더 큰 의미를 몰랐던 것 같다.


아볼로의 사건은 복음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적용. 복음에 대헌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적용.
바울서신에서 교회에 위기가 처할 때 바울의 대처는 복음을 더 자세히 전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 다른 복음의 내용은 “십자가 + 알파”였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성도들이 세상 지혜와 은사를 사랑할 때 바울은 “십자가의 도”, 복음을 다시 설명한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음, 십자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아볼로도 복음을 알았지만 피상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복음을 더 잘 알도록 가르쳤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복음을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십자가를 칭의로만 생각한다. 십자가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풍성하게,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한국교회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이다. 잘못된 신학에서 잘못된 윤리가 나오는 것이다.

27-28절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한다. 고전 1-4장은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방문했음을 암시한다. 아볼로는 아가야 지방에 이르러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되심을 증명한다. ‘증언하다’는 동사는 '증명하다'(prove)는 의미가 있다. 바울이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했던 것 같이(행 17:2-3), 아볼로도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볼로와 바울이 비슷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했던 중요한 일: 강론, 뜻을 풀어, 즉 철학적 토론을 했다. 아볼로도 그와 같은 사역을 했다.

 

적용

1) 사역의 목적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다.
2) 아볼로는 언변과 열심과 담대함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사역에 전부가 아니다. 진리 안에서 바르고 정확하게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역은 초시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침반이 필요하다.
3) 아볼로는 탁월한 사람이지만 가르침 받기를 거절하지 않은 겸손한 사람이다. 아볼로는 teachable 한 사람이었다. 여성에게 배우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배우려는 마음이 열려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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